용안·곤룡포… 용은 황제와 왕의 상징
우리가 익히 아는 중국 요순(堯舜)시대 이후 하상주(夏商周)시대의 청동기에 표현된 짐승 얼굴이 용 얼굴이어야 하는 까닭이 있다. 그 근원을 찾으려면 신화시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상징세계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왕이 정치를 하는 궁궐 정전(正殿) 안에 용 표현이 왜 그리도 많은지 의문을 가져 보아야 한다.삼황오제는 최고의 신들이었으며, 그 가운데 ‘황룡(黃龍)의 몸을 한 신(神)인 헌원(軒轅)’은, 중앙의 황제(黃帝)의 명령을 전달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해서 특히 주목해야 한다. 왜냐 하면 훗날 천하의 통치자인 황제는 황룡을 상징하므로 자연히 최고신인 황제의 이미지와 겹치기 때문에 ‘황제와 왕과 용’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상은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매우 중요한 대목이어서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하지만 요약만 해 두고 몇 가지만 다음에 언급한다.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이 서술한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화세계의 황제는 백성들에게 동(銅)을 모아서 큰 솥(鼎)을 만들게 했는데, 솥이 다 만들어지자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를 맞이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전통은 그대로 내려와 한고조, 즉 유방은 그의 어머니가 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그 황제도 솥을 만들었는데 역시 용이 맞이하러 오자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한무제도 보배로운 솥(寶鼎)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황제와 용과 청동 솥’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연유로 훗날 중국이나 한국의 궁궐에 온통 용 조각이나 그림이 가득하며, 왕을 용과 동일시하여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 왕이 입던 옷을 곤룡포(袞龍袍)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나라의 청동기에 새긴 얼굴은 막연한 수면(獸面·짐승얼굴)이 아니라 용의 얼굴이어야 한다. 이렇게 얼굴을 정면으로 표현하면 중국학자들은 무조건 수면이나 도철(??)이라 하고,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도 무조건 도철이나 귀면(鬼面) 혹은 도깨비라고 부른다. 모두가 옆으로 길게 그려야 비로소 용이라 알아본다. 그러므로 이상의 역사적 상황과 영기문을 알고 나면, 금방 정면 얼굴이 용의 얼굴로 보일 것이다.
상대 말기의 청동기 솥을 살펴보자. ① 세 점째 분석하여 보니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뿔의 출현이다. 뿔은 용의 얼굴에서 강력하게 발산하는 제1영기싹 영기문이지 기록에서처럼 사슴뿔이 아니다. 커다란 눈(보주)이 있고, 눈 위에 눈썹(제1영기싹)이 있으며 귀(2개의 제1영기싹), 코(2개의 제1영기싹)도 있고 입 같은 부분도 보인다. 용의 얼굴에서 이목구비를 찾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나 분명할 때는 숨은 그림 찾기 놀이를 가끔 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짧은 몸 부분이 있어서 붉은 색조로 칠했는데 꼬리가 있고 발톱이 네 개 있는 다리 하나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굵은 면 영기문에 다시 가는 선 영기문을 부여한 셈이어서 더욱 강력한 영기문을 이루고 있다. 굵은 위아래 중심선은 청동기 주조할 때 내외 틀을 고정시키기 위한 필요한 이음매다. 이 조형만 보아도 용의 얼굴을 정면에서 표현한 것이지 분할묘사(Split Representation)가 아니다. 또 다른 서주시대(西周時代:BC 11세기~BC 771년)의 청동 솥을 보자. ② 매우 추상적인 조형으로 흥미 있는 구성을 하여 마치 서예의 예서체 맛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각각 좌우에 용 얼굴과 몸의 측면 모습을 두었으며, 정면에서 보면 정면 얼굴의 효과가 있는 말 그대로 분할묘사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중국학자는 비로소 처음으로 용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대가 지나면서 도철문이란 용어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그 진원지가 어디에 있는지 오랫동안 추적하여 보았다. 여불위(呂不韋:?~BC 235)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정치가로 장양왕 때 승상이 되었고 진시황 때는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었는데,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그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3000여명의 문객의 학식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여씨춘추’ 선식람(先識覽) 제4에 도철이란 용어가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나온다. 선식(先識)이란 미리 알아서 위기에 대비한다는 뜻이다. 그 문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요인으로 현자를 무시하여 민심이 이반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하나라의 걸왕이나 상나라의 주왕 등은 탐욕이 심하여 곧 망했다는 예들을 들면서 나온 말이 도철이다.
‘주나라의 청동정에는 도철을 새겨 넣었는데 머리는 있으나 몸은 없고 사람을 잡아먹는데 아직 삼키지 못한 형상이었다. 남에게 위해를 가하면 피해가 자신의 몸에 미치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선한 행위에는 보상이 따르나, 선하지 않은 행위에는 자신에게 피해가 따른다.’
문맥상으로는 걸왕이나 주왕 같은 폭군을 도철에 비유한 것 같다. 즉, 탐욕스러워 사람을 먹기는 먹었으나 삼키지 못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정치적으로 선행을 하지 않은 폭군들을 경고하는 문맥에서 갑자기 도철이 등장한 것이다. ‘여씨춘추’에 처음으로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이란 기록이 있자, 그 이후로 청동기의 얼굴 모두를 도철로 인식하게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인간의 어리석음이 끝이 없다. 한국의 번역자가 주(註)에 언급한 것을 보기로 하자.
‘도철은 털이 많고 머리에 돼지를 얹었으며 남의 곡식을 빼앗거나 탐욕스러운 인물로 문헌에 나온다. 청동기에는 본편에 묘사된 도철상과 일치하는 문양이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있어서 본편의 설명이 정확하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상나라와 주나라의 청동기 문양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어서 이 구절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여씨춘추’와 청동기의 문양, 후대의 주를 비교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 오류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전체 문맥은 보지 않고 ‘재물과 음식에 탐욕스러운 도철’에 관한 한 단어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천하 통치자인 황제가 천제(天帝)에게 제사할 때 쓰는, 가장 고귀한 음식을 담은 성스러운 예기에 흉측한 도철을 조각한단 말인가! 이처럼 여불위가 한마디 쓰니 그 이후 모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주석을 달아 새로운 오류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리며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최초로 의문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귀면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다. 동양문화는 귀면과 도철에서 해방되어야 비로소 올바른 동양문화를 정립할 수 있다. 왜 그런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앞으로 엄청난 문제들이 풀려질 것이다. 세계문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귀면, 도철, 그로테스크, 수면, 도깨비 등이다. 이 모두가 용이거나 용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오류가 용으로 인식하게 되면 세계문화 해석에 큰 변화, 아니 변혁이 일어날 것이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2015-05-08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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