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총리될 수 있나요” 질문 낳은 메르켈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김정화의 WWW]

“남자도 총리될 수 있나요” 질문 낳은 메르켈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김정화의 WWW]

김정화 기자
입력 2021-10-02 02:15
수정 2023-03-2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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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서울신문DB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서울신문DB
“페미니즘은 본질적으로 사회 참여나 생활 전반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실에 관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8일(현지시간) 퇴임을 코앞에 둔 앙겔라 메르켈(67) 독일 총리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독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2005년 첫 여성 총리로 취임 후 16년간 ‘독일의 얼굴’이었던 메르켈이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작가 치마만다 응고치 아디치에 등 여성계 인사가 참여한 이 토론회 자리에서 그는 “과거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때 훨씬 소극적이었다”며 “이제는 내 생각을 더 분명히 하고 싶다”고 밝혔다.

4연임 끝에 드디어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 메르켈은 오랫동안 국제무대에서 ‘여성 권력’의 상징이었다. 남성 일색의 각국 정상회담 때면 유일한 여성 정치인으로 자리를 빛냈고, 그 희귀한 존재 자체가 성별에 따른 힘의 차이를 보여 주는 뚜렷한 메시지가 됐다.
최초, 최초, 또 최초…메르켈이 쓴 독일의 새 역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1971년 동독 노이브란덴부르크지구 수학 올림피아드에 입상해 기념촬영한 사진. 첫째줄 왼쪽 5번째가 메르켈이다. 벽에는 ‘동무들과 함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영예를 위해 높은 성적을 달성하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 서울신문DB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1971년 동독 노이브란덴부르크지구 수학 올림피아드에 입상해 기념촬영한 사진. 첫째줄 왼쪽 5번째가 메르켈이다. 벽에는 ‘동무들과 함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영예를 위해 높은 성적을 달성하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 서울신문DB
메르켈에겐 각종 ‘최초’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동독 출신의 첫 통일독일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 역대 최연소 장관 및 총리에 이어 헬무트 콜 전 총리와 함께 최장수 총리로 기록을 세웠다.

2017년까지 세 차례 선거에서 승리하며 네 차례 연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위기 대응 능력이다. 재임 기간 조지아와 크림반도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지정학적 도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 따른 유로존 위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유럽 난민 사태,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각종 위기를 안정적으로 봉합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1991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헬무트 콜 전 총리와 얘기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991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헬무트 콜 전 총리와 얘기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995년 선거 포스터의 앙겔라 메르켈. 위키피디아 캡쳐
1995년 선거 포스터의 앙겔라 메르켈. 위키피디아 캡쳐
16년간 국외로는 미국과 프랑스 대통령 각 4명, 영국 총리 5명을 상대했고, 국내로는 좌우 이념 구분없이 포용적인 정치를 펼치며 임기 말까지도 60%가 넘는 지지율을 유지했다. 태어난 이래 ‘메르켈 시대’밖에 겪지 못한 독일 어린이들 사이에선 “남자도 총리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지난해까지 10년 연속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했다. “메르켈의 지도력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맞서는 것부터 100만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을 독일로 들어오게 하는 것까지 냉철함으로 대변된다”는 설명이다.
G7 정상들이 2015년 6월 독일 바이에른주 엘마우 리조트에서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남성 일색의 정상 사이에서 빨간 재킷을 입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눈에 띈다. 서울신문DB
G7 정상들이 2015년 6월 독일 바이에른주 엘마우 리조트에서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남성 일색의 정상 사이에서 빨간 재킷을 입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눈에 띈다. 서울신문DB
그럼에도 사실 여성계에선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여성 한 명이었지만 정작 여성 인권 문제에선 무덤덤하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2017년 베를린에서 열린 여성 20개국 정상회의 당시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에 “페미니즘의 역사는 나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며 “내게 없는 타이틀로 스스로를 꾸미고 싶지 않다”고 얼버무린 게 대표적이다.

최장수 여성 총리지만 보수계 눈치로 ‘소신’ 대신 ‘침묵’
1995년 3월- 메르켈 환경장관이 각료 회의 도중 홀스트 제호퍼 공중보건부 장관과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1995년 3월- 메르켈 환경장관이 각료 회의 도중 홀스트 제호퍼 공중보건부 장관과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기민당 사무총장이던 2000년 전당대회에서 웃고 있다. 서울신문DB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기민당 사무총장이던 2000년 전당대회에서 웃고 있다. 서울신문DB
이 때문에 메르켈에겐 개인으로서 최고의 성취를 거뒀지만, 정작 자국 내 여성 지위 향상엔 기여하지 못했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연방하원의 2017년 여성 비율이 과거보다 5% 포인트 이상 감소해 약 31%에 그친 게 한 예다. 역대 최장기 집권을 이뤄낸 여성 총리 시절에 오히려 여성의 정치 참여는 줄었다는 것이다.

정계뿐 아니라 재계는 더하다. 독일과 스웨덴에 본사를 둔 올브라이트재단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160개 상장 기업 중 110개 이사회에는 여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 회원 697명 중 56명만 여성이었다.
2018년 6월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두손으로 탁자에 몸을 의지한 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쏘아보는 듯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고 있고, 트럼프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피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 오른쪽으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의 모습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등이 서 있다. 사진이 공개되자 미국과 여타 G7 회원국들의 입장이 갈등한 이번 회담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보여 주는 모습은 없을 듯하다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서울신문DB
2018년 6월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두손으로 탁자에 몸을 의지한 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쏘아보는 듯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고 있고, 트럼프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피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 오른쪽으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의 모습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등이 서 있다. 사진이 공개되자 미국과 여타 G7 회원국들의 입장이 갈등한 이번 회담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보여 주는 모습은 없을 듯하다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서울신문DB
일각에선 메르켈이 여성 문제를 주요 의제로 가져가지 않은 게 보수적인 독일 정치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분석한다. 프랑스24는 “메르켈이 속한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 교회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보수적인 정당”이라며 “이들은 기혼 부부를 위한 세제 개편 방안조차 거부해왔다”고 전했다. 메르켈이 내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메르켈은 여성 정체성을 무시함으로써 정치적 성격을 정확히 구축했다”며 “1990년대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기민당에 들어갈 때부터 메르켈은 여성 문제를 추구하지 않기로 선택했고, 성별을 초월한 브랜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이에 메르켈의 임기 말 페미니스트 선언에 대해 이미 늦었다는 비난도 컸다. 베를린에 있는 군다 베르너 연구소의 이네스 카퍼트 대표는 “메르켈의 커리어는 존경할 만하다”면서도 “그에겐 독일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고 상황을 개선할 시간이 16년이나 있었다”고 비판했다.

여성 직업 한계 극복… “삶 자체가 페미니스트의 표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2년 한 토론회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서울신문DB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2년 한 토론회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서울신문DB
하지만 많은 이들은 메르켈이 공개적으로 ‘소신 발언’만 하지 않았을 뿐 그의 삶 자체가 페미니스트의 표본이었다고 평가한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성으로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은 수많은 이의 귀감이 됐다.

미 여성주의 잡지 미즈는 “메르켈은 공직 생활 전 물리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과학자로 일하며 ‘일반적인 여성 직업’의 한계를 벗어났다”며 “여성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몸소 실천했다”고 봤다.

메르켈 본인도 과거 인터뷰에서 “나는 독일의 ‘여성 총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연방 총리”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나는 여성으로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5년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꼽혀 표지를 장식했다. 타임지 캡쳐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5년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꼽혀 표지를 장식했다. 타임지 캡쳐
그는 재임 기간 아동 센터를 위한 정부 기금 확대 등 여성·가족 중심 정책을 시행했고, 지난해 기업 이사회의 여성 할당 의무제도 도입했다. 2015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여성, 소녀들을 위한 교육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2018년 11월 독일 여성 참정권 100주년 기념행사에선 “인구의 50%가 실종됐다. 여성은 가정뿐 아니라 정치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며 사회 참여를 강조해 주목받았다.

같은 정치인인데도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사회적 역할이나 틀에 박힌 이미지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했다. 메르켈은 과거 인터뷰에서 “남자가 100일 연속 짙은 청색 정장을 입는 건 전혀 문제될 게 없지만, 내가 2주 동안 같은 옷을 4번 입으면 편지가 쏟아진다”고 언급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9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가해 연설하고 있다. 서울신문DB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9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가해 연설하고 있다. 서울신문DB
NYT는 “메르켈이 성별 언급을 피한 건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며 “의식적이든 아니든 메르켈은 전세계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었고, 오늘날 여성이 오를 수 있는 높이를 입증해왔다”고 봤다.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알리체 슈바르처는 “메르켈은 전세계 여성에게 존경받고 있고, 이것이 그의 유산이다”라며 “그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고, 위엄과 결단력을 갖고 일을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독일 장난감회사 헤르만 슈피엘바렌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퇴임을 기념하며 500개 한정판으로 출시한 메르켈 모양의 곰인형. 메르켈의 ‘트레이드 마크’인 다이아몬드 손모양과 빨간 재킷을 표현했다. AP 연합뉴스
독일 장난감회사 헤르만 슈피엘바렌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퇴임을 기념하며 500개 한정판으로 출시한 메르켈 모양의 곰인형. 메르켈의 ‘트레이드 마크’인 다이아몬드 손모양과 빨간 재킷을 표현했다. AP 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은 누구 · Angela Dorothea Merkel
1954 서독 함부르크 출생 후 동독에서 성장
1973 라이프치히대 입학
1978~1990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 연구원
1986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
1990 독일 연방 하원의원
1991~1994 여성청소년부 장관
1994~1998 환경부 장관
1998 기민당 사무총장
2000 기민당 당수
2005 독일 첫 여성 총리 취임
2021 16년간 최장기 집권 후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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