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땅] <1>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화관
‘작가의 땅’(작.땅)은 온 생을 다해 글을 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주소다. ‘작.땅’은 치열한 창작의 공간이자 문장으로 대들보를 세운 장소들을 따라간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뒷모습과 곡진한 삶의 희비를 엿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책 바깥의 여행이다. 그곳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1972년 박경리(오른쪽) 작가가 딸 김영주씨와 찍은 사진.
토지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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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찜기의 뚜껑을 연 것 같던 하오가 지나도 청쾌한 바람은 쉽게 산골에 스미지 않았다. 창작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나 있던 산짐승 발자국이 멧돼지의 것이라는 사실은 먼저 입소해 소설을 연재하고 있던 전성태 소설가가 알려주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창작실의 베란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벌레 소리들을 배경음악 삼아 원고 작업에만 매달렸다. 일상에서 오는 잡념들을 접어둔 채 오로지 창작에만 매달릴 수 있는 환경이 더할 나위 없었지만 작업은 진척이 없었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겨우 숨이 좀 가라앉을 만한 바람이 내려왔다. 그리고 바람을 따라 산골의 멧돼지도 왔다.
강원 원주 토지문화관 옆에 있는 박경리 작가의 사저. 작가는 말년까지 이곳에서 집필 작업을 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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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남들이 점심 먹을 때쯤 일어나 식당으로 가다 보니 옥수수밭 한가운데가 우주선이 앉았다 간 모양으로 둥그렇게 파헤쳐져 있었다. 식당에서는 어젯밤에 내려온 멧돼지들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옥수수와 고구마밭이 점점 더 크게 헤쳐진다는 사실도 덧붙여 들려왔다.
토지문화관 옆에 있는 박경리 작가의 사저에는 박 작가의 유품이 그대로 남아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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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는 원고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박경리 선생이 손수 일구시던 밭과 장독대에 다녀왔다. 선생의 거처를 지키고 있는 거위 떼들이 꽉꽉 우는 곳이었다. 그 소리를 따라 창작실과 선생의 울 안까지 오가는 길이 내가 부릴 수 있는 최대치의 여유였다.
정갈한 장독대와 두둑하게 북이 오른 밭이랑을 볼 때마다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작물들로 하루에 한 끼는 꼭 직접 반찬을 만들어 후배 작가들의 식사를 챙겼다는 선생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박경리 작가가 사용하던 물건들. 몽블랑 잉크와 만년필, 안경, 담배 케이스 등이 전시돼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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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까지 밭둑의 흙을 돋우며 생활하셨던 선생답게 남겨진 것들은 매우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선생이 손수 지은 옷들과 밀짚모자, 호미와 낫 같은 농기구들이 생전 그대로 놓여 있었다. 허울 좋은 건물의 이름 크게 쓴 문학관보다는 문인 창작실을 지어 후배 작가들의 작업을 응원했던 그 정신 그대로 오로지 작가들의 복지만을 추구하고 당신께서는 직접 흙과 돌 틈에서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사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창작에 대한 열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이렇게 앉아 게으름을 피우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게으른 후배에 대한 정갈한 꾸짖음, 그렇지만 응원과 격려를 한꺼번에 전해 받는 듯한 그 감각은 오로지 선생의 울타리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좋은 기회에 선생이 사용하던 모든 물건이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처에도 들어가 보았다. 방 한쪽에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던 장은 예전에 선생이 어느 글에서 썼던 그 나비장이었다. 6·25전쟁 당시에 피란을 가기 위해 이불에 싼 나비장을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떠났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돌아온 뒤에 건져냈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애지중지하며 아꼈던 장과 필기구, 오래된 살림살이들, 태우시던 담배 보루까지도 여전한 그곳은 선생이 곧 문을 열고 들어올 것처럼 무척 현실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토지문화관 앞에 서 있는 박경리 작가의 동상. 생전 그가 봤을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서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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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지리 안쪽 산기슭에 자리했지만 제주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작가들이 몰려들었고 급기야 해외 작가들도 한 번쯤 다녀가고 싶은 공간으로 손꼽히는 장소가 됐다. 중견과 신진을 가리지 않고 고루 지원하는 문화관의 정책도 여전했다. 국내 지원을 넘어서 해외 레지던스까지도 교류를 넓힌 상태였다. 매년 봄이면 새로운 작가들이 입주해 60일 동안 혹은 길게는 90일 정도 이곳에 머물다 간다. 올해도 봄이 시작됐으니 창작실도 새 주인을 맞이했겠다.
토지문화관 전경.
토지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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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서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공간은 하동 악양면 평사리의 최 참판 댁 한옥문화관, 통영 박경리기념관 그리고 원주의 박경리 문학공원과 ‘토지’를 완성하고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공간인 이곳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까지 모두 네 군데다.
선생이 17년 동안 사신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택지지구가 되면서 그 자리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많은 문인이 마음을 모았다. 여기에 택지지구 보상금과 토지개발공사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재단과 토지문화관이 들어섰다. 토지문화관 개관식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참석해 선생의 소설과 후배들을 지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기렸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렀지만 창작실에는 여전히 문인들의 입주 신청이 쇄도하고 매일 관람객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룬다. 김세희 관장은 위에 언급한 네 군데의 장소들을 보다 유기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연계해 ‘토지’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더불어 소설 ‘토지’의 콘텐츠들을 보다 현대적이고도 접근성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제반 사업들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선생의 유훈과 창작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숙고 끝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 문학상’을 국내외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들이 토지문화관에서 진행하는 강연 또한 국내에서 다시 듣기 어려운 기회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터였다.
최인훈, 베른하르트 슐링크, 응구기 와 티옹오, 이스마일 카다레 등이 이 상의 역대 수상자였으며 이들의 강연은 창작실에 입주한 작가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찾아든 독자들로 인해 매년 성황리에 개최됐다.
아울러 여러 문화 행사들과 관련된 장소 대관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하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지는 바쁜 문화관이라는 관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소설 ‘토지’의 북적이는 평사리 장터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선생이 일구었던 환경과 삶 그리고 창작의 힘을 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 가겠다는 새 관장의 목소리에 자못 힘이 실려 있었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중에도 문화관 한켠에 위치한 창작실에서 여러 명의 작가가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의 산실이 아닌가.
소설가 이은선
올봄의 여정은 ‘토지’의 길을 따라 문학적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시기를, 그곳에 다녀가면 분명 이 ‘다음’을 살아갈 새로운 용기가 생겨 있을 것이니. 참, 나는 그해 여름에 멧돼지 옥수수 갉아먹는 소리를 들으며 작업했던 두 번째 소설집 ‘유빙의 숲’을 출간했고, 단편소설 마감 역시도 무사히 마쳤다. 선생의 응원이 분명 그곳에 실려 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그 시간을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어디에 해야 할지 몰라 이곳에 적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설가 이은선
2020-03-2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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