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인사이드] 63빌딩 기둥부터 동해 가스전까지… “이 손에서 나왔소이다”

[주말 인사이드] 63빌딩 기둥부터 동해 가스전까지… “이 손에서 나왔소이다”

입력 2014-02-08 00:00
수정 2014-02-08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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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명장들의 삶과 열정

“청년들을 보면 ‘장이 정신’이 부족합니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3D’ 업종이 아니라 무한한 도전이 가능한 세계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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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명장’인 이주형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제관팀장이 지난 6일 울산 소재 현대중공업 조선소에 설치된 해양구조물 파이프에서 용접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제공
‘대한민국 명장’인 이주형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제관팀장이 지난 6일 울산 소재 현대중공업 조선소에 설치된 해양구조물 파이프에서 용접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제공
‘대한민국 명장’인 이주형(54)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제관팀장의 목소리는 에너지로 가득했다. 제관은 도면을 보고 양복을 만드는 작업과 같다. 도면을 보고 철판에 그림을 그려 용접한 뒤 철 구조물을 만든다. 천 대신 철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손끝 기술’이 필수적이다. 명장의 반열에 오르기 힘든 이유다.

이 팀장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9년에 입사해 35년간 한 직장에서 같은 일을 했다. 그는 “중간에 일반직으로 전환해 설계실에서 근무하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거절했다”며 “생산직으로 들어왔으니 한 우물만 파겠다는 결심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의 경력은 지난 30년간 우리나라 산업 역사와 맥을 함께한다. 1980년대 미국 거대 정유사인 엑손이 발주한 ‘하모니 헤리티지 자케트’(해양 석유시추 구조물)에 참여했다. 102층 높이의 4만t짜리 구조물로 당시 세계 최고 규모였다. 이 팀장은 “고(故) 정주영 회장이 ‘해 봤어?’라고 묻는 광고에 나오는 배경이 바로 이 구조물”이라면서 “처음 입사해서는 20세기 최고 역사(役事)라 불리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1985년에는 63빌딩의 기둥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1994년 붕괴된 성수대교를 복구하는 데 참여했고, 2002년에는 이어도 과학기지 및 동해 가스전의 구조물을 만드는 공사에도 참여했다. 이후 대형 선박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 팀장은 2008년 대한민국 명장 칭호를 받았다. 그는 “1970~1980년대 오일달러를 많이 벌어들인다는 자부심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처음에는 제관 일을 배우기 위해 장비에 손을 댔다가 뺨을 맞기 일쑤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장이 근성’이라고 불렀다. 당시 선배들은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기술을 가져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출근 시간인 오전 8시보다 2시간 먼저 출근했다. 장비 청소를 하고, 끝나면 막걸리도 대접했다. 이 팀장은 “1년 정도를 이렇게 지내자 선배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다”면서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왕도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밤 10시에 회사 일을 마치면 바로 잔 뒤에 새벽 3~4시에 일어나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대졸 중심인 사무직에 비해 생산직은 승진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며 “지금은 노사분규가 거의 없지만 1987년 노사분규가 터졌을 때는 조업파와 비조업파가 나뉘어 직원들 사이에 갈등이 심했는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 요즘 이 팀장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그는 “지금은 3D 업종이라고 해 조선업보다는 서비스업이나 정보기술(IT)로 많이 간다”면서 “하지만 힘든 일을 하며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장이 정신’을 갖추려는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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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팀장 같은 대한민국 명장은 96개 직종에 547명이다. 대한민국 명장은 숙련기술장려법에 따라 정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인정한 해당 분야 최고 권위자다. 해당 직종 경력이 15년 이상이어야 하고 최고의 숙련 기술을 보유해야 한다.

대한민국 명장으로 뽑히면 일시장려금 2000만원이 지급된다. 계속 같은 직종에 근무할 경우 연수에 따라 계속종사장려금(연 167만~357만원)을 받는다. 기술 선진국 산업 시찰 기회가 주어지고 숙련 기술 관련 행사 심사위원 위촉, 산업 현장 교수단·청소년 직업진로지도 강사 초빙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대부분 기업 내에서 먼저 명장 후보에 선발돼야 한다. 한 명장은 “2003년부터 도전했는데 다섯 번째인 2011년에야 명장에 선발될 수 있었다”며 “회사와의 관계도 선발에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대한민국 명장 설문 결과(2013년 8월 19일~9월 27일)에 따르면 213명의 대한민국 명장 중 남성이 91.5%(195명)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또 자기 사업을 하는 명장이 34.3%(73명), 기업 종사자가 65.7%(140명)였다.

명장들은 대부분 어려운 유년 시절의 경험을 갖고 있는 ‘자수성가형’이었다. 우선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전체 중 36.2%(77명)가 부모의 소득 수준이 하류층이었고 중하층이 29.6%(63명)으로 뒤를 이었다. 상류층이었다고 답한 이는 2.3%(5명)에 불과했다. 부모의 직업은 농업이 66.7%(142명)로 가장 많았다. 형제자매 수는 평균 5.3명이었다. 경쟁이 숙명이었던 셈이다. 남자 명장 중 장남이라고 답한 이는 46.1%였다. 집안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일을 시작한 나이는 10대 후반이 47.4%(101명)로 가장 많았다. 10대 초반에 일을 시작한 명장도 4.7%(10명)였다. 일을 시작할 당시 학력은 고졸이 53.1%(113명)로 절반을 넘었다. 중졸은 24.4%(52명)였다. 초졸 이하는 16%(34명)로 전문대졸 이상(6.6%·14명)보다 많았다.

거주지의 경우 직장에 근무하는 명장은 영남권 출신이 절반을 넘어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한 산업화 과정을 반영했다. 자기 사업을 하는 명장은 수도권 거주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기술은 바로 위 선배를 통해 배웠다는 이가 45.7%(64명)로 가장 많았지만, 스스로 익혔다는 사람도 35.7%(50명)로 꽤 많았다. 선배들이 후배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인식해 기술을 잘 가르쳐 주지 않던 1970~1980년대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 선진국 기술의 유입으로 혼자 습득해야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기업 근무 명장과 자기 사업 명장 모두 기능을 배운 이들에게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손끝 기술’이었지만, ‘자세와 태도’가 뒤를 이어 기본 인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배에게 아쉬운 점은 작업에 임하는 태도나 자세가 부족하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어 가장 많았다. 기본 인성과 끈기 측면에서 요즘 젊은 세대가 미흡하다고 인식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명장들은 어떤 인성적 특질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는 ‘꾸준한 학습과 부단한 노력’이다. 또 책임감과 자긍심이 강했다. 한 명장은 “다른 회사에서 3배의 봉급을 준다고 했지만 의리가 있어 안 간다고 했다”며 “내가 크고 가족을 먹여 살린 회사를 떠나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업적주의도 이들의 특징이다. 남들과 다른 업적은 현장에서 학력과 신분의 장벽을 넘어서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또 승진을 위한 거의 유일한 발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장들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은 사실상 은퇴가 없다는 점이었다. 은퇴 후 평생 몸을 담은 회사의 계열사에 취직하거나 경력을 바탕으로 각종 강연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성재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여성 명장들의 경우 자기 사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후배에게 기술을 전수하거나 경력 개발 경로가 분명하지 않은 것, 장인적 기술을 이용한 작품의 상품화가 힘든 점 등을 어려움으로 제시하고 있다”며 “정부가 정책적으로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2014-02-0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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