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다큐 줌인] 그라피티, 벽 너머 세상과 소통하다

[포토 다큐 줌인] 그라피티, 벽 너머 세상과 소통하다

입력 2012-03-30 00:00
수정 2012-03-30 00:26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자유를 그린다…고로 나는 존재한다

서울 시내 한 고가다리 밑. 한 무리의 청년들이 가방 안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를 꺼내 들었다. “치익! 치익!” 색색의 스프레이 페인트가 벽면에 뿌려지자 거칠고 투박하기만 하던 회색빛 벽이 독특한 조형미를 갖춘 글씨와 캐릭터가 그려진 커다란 캔버스로 점차 변해 간다. “이런 걸 스프레이로만 그리는 거냐?”, “다리 밑이 어둡고 삭막했는데 그림이 그려지니 분위기가 밝아져서 좋다.” 행인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관심을 보인다. 어느덧 회색빛 벽이 화려한 색을 입고 길을 지나는 모든 이들을 위한 도심 속 무료 갤러리로 변신한다.

이미지 확대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 공사장 가림막에 지난해 말 그라피티 라이터들이 제대로 된 그라피티를 보여주기 위해 무단으로 그려넣은 그라피티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 공사장 가림막에 지난해 말 그라피티 라이터들이 제대로 된 그라피티를 보여주기 위해 무단으로 그려넣은 그라피티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미지 확대
비보이이자 그라피티 라이터인 에라원이 그라피티를 그리기 위해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고 있다.
비보이이자 그라피티 라이터인 에라원이 그라피티를 그리기 위해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고 있다.




회색빛 벽은 커다란 캔버스…도심 속 무료 갤러리로

청년들이 벽에 그린 글씨와 캐릭터는 그라피티(Graffiti)라는 스트리트 아트(거리예술)의 한 종류다. 1960년대 미국 뉴욕의 흑인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고자 적은 낙서, 갱들이 영역 표시를 하려고 벽에 그리던 태그(tag·자신만의 표지 또는 가명)에서 출발했다. ‘Taki 183’이라는 자신의 태그를 뉴욕 도심 곳곳에 남긴 데미트리우스라는 그리스 출신 청년의 이야기가 1971년 뉴욕타임스에 실리면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후 그라피티는 회색빛 도시에 화려함을 더하는 스트리트 아트로 발전해 키스 해링, 장 미셸 바스키아 같은 유명 작가들을 배출하게 된다.

다 큰 녀석들의 낙서라고?…당당한 거리예술이죠!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중반 미국의 힙합 문화가 들어오면서 전파됐지만 그라피티는 오랫동안 ‘다 큰 녀석들이 하는 낙서’ 정도로 오해받았다. 벽을 이용하는 탓에 공공 장소나 타인 소유의 건 물 등에 허가받지 않고 불법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으로는 예술행위가 아닌 반달리즘(문화·공공시설 파괴행위)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젊은 층이 많이 찾는 가게 벽면의 인테리어로, 또는 여러 문화행사의 한 프로그램으로 그라피티를 접하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점차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고 있다.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에 반한 젊은 층뿐만 아니라 강렬하고 화려한 색상에 매료된 중장년층까지 팬층이 넓어지고 있다. 그라피티 라이터인 에라원은 “얼마 전 굴다리에 그라피티를 그린 일로 관할 도로교통사업소에 불려 갔다. 우려와는 달리 관계자분이 음침하던 다리 밑 분위기가 밝아져서 주민들도 좋아하고, 환경 미화의 효과도 있으니 계속 그려도 된다고 허가해 주셨다.”며 긍정적인 변화상을 보여 주는 일화를 들려줬다.

이미지 확대
그라피티 작업을 마치고 난 에라원의 손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얼룩져 있다.
그라피티 작업을 마치고 난 에라원의 손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얼룩져 있다.


이미지 확대
지난 2월 4일부터 3월 3일까지 서울 방배동 토스트 갤러리에서 열린 ‘더 그라피티’(The GRAFFITI) 전시장을 찾은 학생들이 캔버스에 그려진 그라피티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국내 1세대 그라피티 라이터들이 대거 참여한 이 전시는 미술팬들과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 2월 4일부터 3월 3일까지 서울 방배동 토스트 갤러리에서 열린 ‘더 그라피티’(The GRAFFITI) 전시장을 찾은 학생들이 캔버스에 그려진 그라피티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국내 1세대 그라피티 라이터들이 대거 참여한 이 전시는 미술팬들과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미지 확대
‘스트리트 보이’라는 캐릭터로 주목받고 있는 그라피티 라이터 홍삼이 불꺼진 갤러리에서 스프레이 페인트 대신 빛을 이용해 그라피티 작품을 그리고 있다.
‘스트리트 보이’라는 캐릭터로 주목받고 있는 그라피티 라이터 홍삼이 불꺼진 갤러리에서 스프레이 페인트 대신 빛을 이용해 그라피티 작품을 그리고 있다.


이미지 확대
서울 길음동 고가 밑에서 그라피티 라이터 홍삼이 ‘스트리트 보이’라는 창작 캐릭터를 이용한 그라피티 작품을 그리고 있다.
서울 길음동 고가 밑에서 그라피티 라이터 홍삼이 ‘스트리트 보이’라는 창작 캐릭터를 이용한 그라피티 작품을 그리고 있다.




이미지 확대
에라원이 자신의 집 다락방에 있는 작업실에서 다음에 그릴 그라피티의 밑그림을 스케치북에 그리고 있다.
에라원이 자신의 집 다락방에 있는 작업실에서 다음에 그릴 그라피티의 밑그림을 스케치북에 그리고 있다.




팝아트와 눈 맞다…마니아 아닌 대중과 입맞추다

힙합을 좋아하는 이들의 마니아 문화로 홀대받던 그라피티는 예술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문화적으로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지난해 말 그라피티 라이터 25명이 모여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공사장 가림막에 플래시몹 형식으로 그라피티를 그려 넣으며 예술가로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제 그라피티는 거리를 넘어 주류 미술계의 주무대인 갤러리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15년 이상 그라피티를 그려 온 반달, 산타, 후디니, 제이앤제이, 찰스 장 등 1세대 라이터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을 받은 레고, 홍삼, 에라원 등 2세대 라이터들과 함께 그라피티를 팝아트와 결합시켜서 예술화·대중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올해 초만 예닐곱 곳의 갤러리에서 벽이 아닌 캔버스에 그린 작품을 선보이며 대중에게 그라피티의 매력을 전파하고 있다.

“18년 동안 거리에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지금 캔버스에서 그림을 그리고 갤러리에서 전시를 한다. 대중과 함께 소통하려는 시간인 것이다.” 만화 같은 캐릭터를 주로 그리는 후디니는 한 전시장에 붙인 작가의 변에서 거리 예술인 그라피티가 갤러리로 뛰어든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예술가로서 그라피티 라이터들의 행보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언젠가 이들 중에서 한국의 키스 해링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글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2012-03-30 28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