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그 실사들...전두광=전두환[사진창고]

영화 ‘서울의 봄’ 그 실사들...전두광=전두환[사진창고]

정연호 기자
정연호 기자
입력 2023-12-08 14:11
수정 2024-01-3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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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창고’는 119년 역사의 서울신문 DB사진들을 꺼내어 현재의 시대상과 견주어보는 멀티미디어부 데스크의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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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송되는 전두환
압송되는 전두환 1995년 12월 3일 경남합천에서 전두환씨가 안양교도소로 압송되고 있다. 1995. 12. 3 서울신문 사진창고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3주 만에 70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의 흥행이 이어지면서 12.12 군사반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신문 사진창고에서 찾은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전두환씨의 사진을 통해 엄혹했던 그 시기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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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주역들 단체사진
반란의 주역들 단체사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청와대 구본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신군부 실세들.앞줄 왼쪽부터 이상규,최세창,박희도,노태우,전두환,차규헌,유학성,황영시,김윤호,정호용,김기택,가운데줄 왼쪽부터 박준병,이필섭,권정달,고명승,정도영,장기오,우국일,최예섭,조흥,송웅섭,장세동,김택수,뒷줄 왼쪽부터 남웅종,김호영,신윤희,최석립,심재국,허삼수,김진영,허화평,이상영,이차군,백운택.이사진에는 상황이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과 보안사 간부들도 들어있으며 좌우측 몇명은 촬영때 빠져 나중에 합성해 넣은 것임.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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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되는 정승화 총장
연행되는 정승화 총장 12.12 당시 공관에서 신군부측에 강제 연행된 뒤 조사를 받으러 가고 있는 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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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 현판식
국보위 현판식 1980년 5월 31일은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줄여서 국보위가 설치된 날이다.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부의 실세를 모두 제거하면서 군부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됐다.이후 1980년 5.17 내란 사건을 통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여야 정치인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 및 재야 세력을 모두 체포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면서 군부독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1980. 6. 5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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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 떠나는 날
최규하 대통령 떠나는 날 1980년 8월 18일 최규하 전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를 떠나기 전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과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12.12 군사반란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12일 저녁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에 따라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 병력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뒤 정승화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로 연행했다.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진 명백한 반란행위였다. 압박을 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다음날 정총장의 연행을 뒤늦게 재가했다. 반란의 다음 날인 13일 군 사조직인 ‘하나회’ 일원이었던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임명되면서 반란의 세력들에 의해 군 주요보직들이 장악되고 말았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까지 주도해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1979년 10.26 사건부터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까지의 정치적 과도기에 전국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을 가리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서울의 봄’이라 했다. 이는 197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에 유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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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공화국 출범
제 5공화국 출범 전두환 제12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1981년 3월 3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남덕우국무총리, 이영섭 대법원장등 3부요인, 퍼시미상원외교위원장을 비롯한 70개국 경축사절 3백50명의 해외교포 정치 경제 사화 문화등 각계대표 그리고 지역대표 5천여명등 9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이날 전대통령의 제12대 대통령취임으로 제5공화국정부가 정식 출범했다. 1981. 3. 3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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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카퍼레이드
대통령 카퍼레이드 1986년 4월 21일 유럽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차량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1986. 4. 21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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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진상 기자회견
12.12 진상 기자회견 1987년 11월 정병주 전특전사령관(오른쪽.작고)과 김진기 전 육군헌병감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12.12의 진상을 밝히는 도중 사건 당일 신군부측에 체포될때 입은 왼쪽팔의 총상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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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앞에서도 독상 받는 전두환
국민들 앞에서도 독상 받는 전두환 1986년 10월 17일 경기도 여주군에서 벼수확을 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농민들과 오찬을 하고 있다. 1986. 10. 17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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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노태우
전두환과 노태우 1987년 7월 10일 전두환씨가 민정당 총재직 사퇴선언을 하기 위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단상에 오르고 있다. 1987. 7. 10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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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의 전두환
백담사의 전두환 1988년 11월 강원도 백담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전두환씨의 모습이 서울신문 카메라에 잡혔다. 당시 백담사에 기거 중인 전두환의 모습을 담기 위해 많은 언론사 사진기자들이 백담사 주변에서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기도 했다. 1988. 11.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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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노태우
전두환과 노태우 전두환 전대통령이 퇴임한 1988년 2월 이후 처음으로 단둘이 만나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오찬을 나누며 5공청산과정에서 쌓인 앙금을 풀고 화해했다. 서울신문 사진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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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입은 전두환. 노태우
수의 입은 전두환. 노태우 1996년 8월 26일 전두환씨와 노태우씨 등이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고 있다. 전두환씨는 1심에서는 사형 2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동서화합 차원에서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사면을 감행했다. 1996. 8. 26 서울신문 사진창고
군사반란의 주동자인 전두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까지 12.12 쿠데타는 집권세력에 의해 정당화됐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에 의해 12.12는 ‘쿠데타(반란)’로 규정됐고 정승화 총장 등이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반란가담자들을 고소했지만 검찰은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1995년 헌법재판소에서 12.12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다. 이후 특별법 제정 등의 과정을 통해 국민들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수의를 입고 재판정에 서는 장면을 보게 됐다. 1996년 12월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 노태우에게는 징역 15년형이 선고됐지만 이듬해인 1997년 이 두 사람은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2021년 90세의 나이로 전두환씨는 결국 제대로 사과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사망한지 2년이 지났지만 그의 유골은 그 어디에도 묻히지 못하고 현재도 연희동 자택에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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