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복지’ 전문가 임성규 사장이 말하는 주거복지
“우리 주택관리공단이 하는 일은 크게 보면 LH로부터 위탁받은 공공주택의 임대업무, 시설 유지·관리를 책임지는 주거관리와 함께 공공주택에 입주한 분들의 주거복지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공공주택 가운데 영구임대 아파트가 있습니다. 영구임대 하면 가난과 빈곤, 고독과 사회적 차별 이런 것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곳을 사람 냄새 나는 동네로 바꾸는 것이 주택관리공단의 역할이자 제일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많이 사는 곳의 주거복지를 업그레이드해서 이분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죠. 그래야 사회 복지가 좀 더 촘촘하게 스며들어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현장 복지 전문가’ 임성규(56) 주택관리공단 사장은 주거복지와 공동체 문제로 말문을 열었다. 규모가 작은 다세대 밀집지역에 사는 이들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복지의 사각지대를 우려했다. “관리사무소가 있는 아파트는 그래도 낫습니다만 관리사무소조차 없는 곳에 다세대 밀집 주거지역에 사는 이들에 대해서는 지역 단위에서 복지기관, 사회적 경제조직, 사회적 기업 등 주거와 다양한 단위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를 더욱 촘촘하게 구성하고 풀어나가는 부분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공단의 본사가 있는 경남 진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난 24일 오후 늦게 인터뷰를 했다.
“사회적 약자인 영구·국민임대 입주자 위한 복지로 바꿔야
관리사무소-복지관 엮고, 지역 풀뿌리단체 묶는 게 제 역할”
- 주택관리공단이 주로 하는 일은.
“LH가 임대 주택을 공급하면 우리는 관리하는 LH의 자회사입니다. 1998년도에 분사됐는데 전국에 27만여 세대를 관리합니다. 영구임대 아파트 14만세대, 국민임대 8만 9000세대, 공공임대 2만 5000세대, 소규모 매입임대를 포함해 기타 자치단체 임대주택 등으로 1만 5000세대 입니다. 영구임대 입주자의 60% 정도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거나 장애인, 독거노인입니다. 국민임대 아파트 역시 10%가량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거나 홀로 사는 노인들입니다. 이런 비율에서 보듯 사회적으로 정말 어려운 분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요. 이분들의 삶의 질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이지요. 복지를 전공한 제게 맡겨진 소임 역시 이런 분들을 위해 주거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꿔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복지, 정부가 나서야 하지 않나.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풀뿌리 단위들과의 협업을 끌어내 시너지를 만들어야 더큰 복지가 될 수 있습니다. 영구임대 단지에는 복지관이 의무적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관리사무소도 있습니다. 이게 잘 되는 곳도 있지만, 복지관과 관리사무소가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곳도 많아요. 제가 이 두 기관을 엮어주고, 입주민들이 역시 복지 서비스를 받는 입장이긴 하지만 이분들이 당당하게 지역사회에서 시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협업을 하며 시너지를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묶어주면 삶의 질로서 주거복지가 제대로 돌아가는 형태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LH는 LH대로, 주택관리공단은 공단대로 하고, 복지관은 복지관대로, 지역의 풀뿌리단체는 풀뿌리대로 따로따로 하는 것을 협업의 구조로 묶어 복지 사각지대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 복지 전문가이면서 주택관리공단 사장인 제게 주어진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현장 복지 경험 살린 주택관리공단 사장이라 가능한 일
영구임대 입주자에 ‘환영파티’개최…사람 냄새 훈훈 감동”
- 복지와 관리 양쪽을 아우를 수 있나.
“제가 사회복지 일을 오랫동안 했으니 복지관에 가보면 상당수가 후배들이고 대다수가 저를 아는 사회복지사들입니다. 저 역시 복지관의 애로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고, 복지관의 방향에 대해서 ‘함께 가자’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반면 관리사무소는 어찌 됐든 제가 사장으로 와 있고, 사장으로서 주택관리공단 직원들과 복지관이 협업을 하자라는 것이 틀린 말도 아니고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원들도 잘 알고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쪽을 묶는 게 가능한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했던 복지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것이죠. 예컨대 대전의 판암 관리사무소와 생명종합사회 복지관이 있는데 이 두 단위가 협업의 구조를 잘 만들고 있습니다. 입주민들이 새로 오면 관리사무소와 복지관이 함께 ‘입주민 환영파티’를 열어줍니다. 사회적 차별과 고독, 가난 등에 시달리던 분들이 ‘입주민 환영파티’를 예상치 못한 일이죠. 환영파티를 하면서 잔손 보기나 시설관련한 문제는 관리사무소가, 입주민들의 소소한 복지적 서비스에 대해서는 복지관이, 마을의 이곳저곳에 대해서는 기존 주민들이 설명해줍니다. 밀려서 밀려서 사회적 차별의 상징인 영구임대아파트에 이사 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뜻밖의 환대에 여기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며 감동하거나 아주 만족해합니다.”
- 복지와 관련된 일은 얼마나 했나.
“1998년도에 제가 태어나 자란 도봉구에 처음으로 복지관이 생깁니다. 당시 저는 목사로서 지역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2002년도에 방아골복지관 관장으로 와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는데다 목회도 같이할 수 있겠다 싶어 비상근 관장으로 하겠다며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복지관 일이 생각보다 너무 방대하고 많아서 두 가지 일을 도저히 같이 할 수가 없어서 목회를 사임했습니다. 2004년 8월 들어 상근 복지관 관장으로 일하기 시작해 2016년 7월까지 복지 영역에서 일을 했습니다.”
목사→현장 복지→주택관리사장으로 변신
임 사장은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듯 하다. “지금도 개발이 덜 된 곳이지만 어릴 때만 해도 가마때기집, 루핑집(천막집), 판잣집이 즐비한 동네였습니다. 정말 철거민, 실향민, 빈곤, 민중 이런 단어들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아버지(87)가 목회를 한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이타적인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육성회비를 제때 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야, 목사는 말이야, 교인들보다 가난해서도 안 되지만 부자여서도 안 돼’라고 하셨죠. 제가 육성회비를 제대로 내지 못한 것도 아버지가 말한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 목회를 했다고?
“학부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대학원에 가서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됐습니다. 사실, 아버지처럼 가난한 사람과 어울려 목회활동을 하는 데 자신이 없어서 학부에서는 신학 대신 사회사업학과(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 자연스럽게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참여하다가 4학년 때 후배들이 ‘선배들 가운데 누가 학교 남아서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대학원에 갈 사람을 찾으니 제가 …. 당시 저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시는 가난한 사람, 민중적인 목회 활동하고, 소위 말하는 학생운동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이런 생활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서 사회문제와 노동과 빈민들을 위한 신학인 민중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습니다.”
“92 목회 생활로 사회 첫발 … 빈자 위한 목회 고민
‘목사는 교인보다 가난해도, 부자도 안돼’ 아버지 소신
학생운동과 아버지 목회 활동 차이 고민하다 목사 길
아버지, 은퇴 앞두고 후임 제의 …1주일 고민 끝에 거절”
- 목회 활동을 오래 했나.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1992년도에 고향인 도봉구에서 개척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로서 지역사회 운동과 시민사회나 복지 이런 것을 어떻게 민중적으로 재해석해 목회활동에 접목해야 하나하고 고민하며 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2004년 아버님이 은퇴를 앞두고 아들이 눈에 밟히신듯 저보고 ‘후임으로 왔으면 좋겠다’며 제안하셨습니다. 아버지가 1959년 개척한 교회를 평생 한 자리에서 45년간 목회 활동을 한 교회였고, 교인은 500명이 넘는 중견교회였습니다. 제가 1주일가량 고민하다 ‘아버님, 이건 아무리 뭐라 그래도 세습입니다. 제가 어떻게 가겠습니까, 안 갑니다. 아버지 만나시려고 하는 장로님들에게 (아들을 후임 목사로 추천한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아들아,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 복지관의 역할을 많이 바꿨다던데.
“당시만 해도 복지관은 개인과 가족에 맞춘 사례관리와 상담 등 공급자 중심이며, 전문가 중심의 작은 복지였습니다. 그런 것이 이젠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 주민조직과 지역사회운동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예를 든다면 이전의 전통적인 재가복지 방식으로 어르신들이 불편하면 사회복지사가 어르신을 모시고 병원에 가요.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국으로 가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 어르신을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리는 거예요. 이때 병원에 사람들이 많다거나 약국에 사람이 붐비면 많이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2000년대 초반, 복지관에서 하는 재가복지의 유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적극적인 주민이 참여하는 방식인 ‘효플러스네트워크’를 만든 겁니다. 먼저 동네에서 의사·약사·한의사 15명 정도로 구성된 ‘의료인 모임’을 만듭니다. 이중 가장 적극적인 의사 2명은 1주일에 두 번씩 왕진 가방을 메고 점심시간에 어르신댁에 방문해요. 그리고 의사의 왕진을 받지 못한 어르신들은 아무 때나 병원에 오실 수 있게 해 주시고, 그래서 그 처방전을 약사에게 전달해주면 약사는 약을 받아서 복지관에 갖다주고, 복지관이나 지역 사회 활동가들이 그것을 어르신들에게 갖다 드리는 것이죠. 그런데 어르신들은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여성들, 가정주부들을 대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의사와 간호사에게서 응급처치 교육을 받아서 1주일에 2회 이상 가정방문을 하고 말동무를 하고, 건강을 체크하고…. 또 ‘도우기’라 해서 아버지들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도배·장판·전기·수도 이런 전문 기술을 가진 동네 아버지들의 모임인데, 이분들이 한 달에 한 가정씩 집수리를 해주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이 대개 반지하에 살거든요. 눅눅하고 냄새가 나고 주거환경이 안 좋잖아요. 또 이런 모임들이 서로 선순환 하는 구조를 만들고 사회복지사들은 이 주민모임이 잘 돌아가게 만들면 됩니다. 이게 결국은 지역사회 주민들, 전문성을 가진 주민들을 조직하고, 조직된 사람들이 지역사회의 문제에 참여하게 하는 네트워크 방식으로 진행한 거예요.”
- 상당히 선진적이었다.
“방아골복지관은 당시 복지계에서는 관심의 대상이었던 거죠. 실습을 하게 되면, 보통은 4주인데, 저희는 6주 정도 했죠. 그래도 실습생 대기자가 많을 정도로 지원자가 많았죠. 그만큼 사회복지계에서 유명한 복지관이 됐습니다. 서울시 평가에서 제일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7년 방아골복지관의 실천사례집을 엮어 만든 ‘신명나는 지역복지 만들기’라는 책도 사회복지계에서는 센세이셔널 하고, 사회복지사들과 풀뿌리 활동가들이 많이 읽은 책이었죠. 그러나 당시 구청장에 의해 자신 편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위탁에서 제외됐습니다. 복지를 하면서 지역사회의 풀뿌리 시민단체의 중심에 일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 서울시복지재단 대표이사로도 있었는데.
“네, 2012년부터 4년 반 동안 일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니 많은 사람이 제게 ‘박원순 서울시장과 어떤 관계냐’고 묻더라고요. 신명나는 지역복지 만들기 추천서를 써주시기는 했지만 사실 별다른 인연이 없습니다. 아마도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에서 실천하며 성과를 만든 경험을 서울시 차원에서 넓게 시도해 보라는 메시지라고 보았습니다. 서울시복지재단 4년 반동안 ‘마을지향 복지관’, ‘사회복지 공익법지원센터’, ‘금융복지상담센터’, ‘찾아가는동주민센터’ 등 굵직한 사업을 만들어 내고 시도해 본 아주 중요한 협업과 융합의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관장 재직한 방아골복지관 활동 선진적… 복지계 관심
서울시복지재단 대표 갔더니, 박원순 시장과 관계 초점
방아골복지관 성공스토리 서울 전체로 확대하란 메시지
목회-복지-주택관리, 어려운 사람 위해 사는 의미 비슷”
‘방아골복지관’ 성공 스토리를 가진 임 사장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서 복지국가특별위원회의 공동 위원장을 맡았다. 앞서 2007년에 서울시 예산의 상당 부분이 투입되는 복지예산을 감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이태수 꽃동네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서울복지시민연대를 만들었다. 2009년 영구임대 아파트가 2411세대가 있는 서울 강서구 가양5복지관 관장도 지냈다. 2011년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장에 출마해 당선되는 등 복지 현장에서 많은 일을 했다.
- 목회에서 복지, 다시 주택관리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굴절되고 어려운 분들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그 분들 삶의 질을 한 차원 높인다면 면에서는 목회와 복지, 주택관리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편적 복지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보편적 복지가 생활 속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는 복지가 좀 더 광의적인 의미에서 마을 지향의 일을 지역사회로 확대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울롱도까지 사업장이 있는 주택관리공단을 통해 전국적으로 복지와 주거복지를 협업의 구조로 만들어 좀 더 촘촘히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마을의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주민들의 자발성을 확보하고 이것을 삶의 기본인 주거와 복지를 협업의 구조로 전국화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택관리공단도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입주민들을 찾아가서 이들과 호흡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복지관도 공급자 중심에서 벗어나 주민이 참여하고 주민이 중심인 마을 지향의 복지관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임성규 주택관리공단 사장은 2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적 약자인 영구임대 아파트 입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관리사무소와 복지관, 지역 풀뿌리단체를 엮는 게 화두”라고 강조했다. 임 사장은 목회자의 길을 걷다가 10여년간 현장에서 복지 일을 하기도 했다.2019. 5. 24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현장 복지 전문가’ 임성규(56) 주택관리공단 사장은 주거복지와 공동체 문제로 말문을 열었다. 규모가 작은 다세대 밀집지역에 사는 이들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복지의 사각지대를 우려했다. “관리사무소가 있는 아파트는 그래도 낫습니다만 관리사무소조차 없는 곳에 다세대 밀집 주거지역에 사는 이들에 대해서는 지역 단위에서 복지기관, 사회적 경제조직, 사회적 기업 등 주거와 다양한 단위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를 더욱 촘촘하게 구성하고 풀어나가는 부분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공단의 본사가 있는 경남 진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난 24일 오후 늦게 인터뷰를 했다.
“사회적 약자인 영구·국민임대 입주자 위한 복지로 바꿔야
관리사무소-복지관 엮고, 지역 풀뿌리단체 묶는 게 제 역할”
2005년부터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에서 주민들이 참여하는 축제인 ‘골목대장터’의 행사인 100m 김밥만들기 모습. 임성규 사장 페이스북
“LH가 임대 주택을 공급하면 우리는 관리하는 LH의 자회사입니다. 1998년도에 분사됐는데 전국에 27만여 세대를 관리합니다. 영구임대 아파트 14만세대, 국민임대 8만 9000세대, 공공임대 2만 5000세대, 소규모 매입임대를 포함해 기타 자치단체 임대주택 등으로 1만 5000세대 입니다. 영구임대 입주자의 60% 정도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거나 장애인, 독거노인입니다. 국민임대 아파트 역시 10%가량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거나 홀로 사는 노인들입니다. 이런 비율에서 보듯 사회적으로 정말 어려운 분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요. 이분들의 삶의 질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이지요. 복지를 전공한 제게 맡겨진 소임 역시 이런 분들을 위해 주거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꿔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복지, 정부가 나서야 하지 않나.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풀뿌리 단위들과의 협업을 끌어내 시너지를 만들어야 더큰 복지가 될 수 있습니다. 영구임대 단지에는 복지관이 의무적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관리사무소도 있습니다. 이게 잘 되는 곳도 있지만, 복지관과 관리사무소가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곳도 많아요. 제가 이 두 기관을 엮어주고, 입주민들이 역시 복지 서비스를 받는 입장이긴 하지만 이분들이 당당하게 지역사회에서 시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협업을 하며 시너지를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묶어주면 삶의 질로서 주거복지가 제대로 돌아가는 형태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LH는 LH대로, 주택관리공단은 공단대로 하고, 복지관은 복지관대로, 지역의 풀뿌리단체는 풀뿌리대로 따로따로 하는 것을 협업의 구조로 묶어 복지 사각지대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 복지 전문가이면서 주택관리공단 사장인 제게 주어진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현장 복지 경험 살린 주택관리공단 사장이라 가능한 일
영구임대 입주자에 ‘환영파티’개최…사람 냄새 훈훈 감동”
서울 도봉구의 커뮤니티 공간인 숲속애에서 동네 주민들이 함께 함께 식사 한 후 기념사진. 임성규 사장 페이스북
“제가 사회복지 일을 오랫동안 했으니 복지관에 가보면 상당수가 후배들이고 대다수가 저를 아는 사회복지사들입니다. 저 역시 복지관의 애로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고, 복지관의 방향에 대해서 ‘함께 가자’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반면 관리사무소는 어찌 됐든 제가 사장으로 와 있고, 사장으로서 주택관리공단 직원들과 복지관이 협업을 하자라는 것이 틀린 말도 아니고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원들도 잘 알고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쪽을 묶는 게 가능한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했던 복지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것이죠. 예컨대 대전의 판암 관리사무소와 생명종합사회 복지관이 있는데 이 두 단위가 협업의 구조를 잘 만들고 있습니다. 입주민들이 새로 오면 관리사무소와 복지관이 함께 ‘입주민 환영파티’를 열어줍니다. 사회적 차별과 고독, 가난 등에 시달리던 분들이 ‘입주민 환영파티’를 예상치 못한 일이죠. 환영파티를 하면서 잔손 보기나 시설관련한 문제는 관리사무소가, 입주민들의 소소한 복지적 서비스에 대해서는 복지관이, 마을의 이곳저곳에 대해서는 기존 주민들이 설명해줍니다. 밀려서 밀려서 사회적 차별의 상징인 영구임대아파트에 이사 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뜻밖의 환대에 여기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며 감동하거나 아주 만족해합니다.”
- 복지와 관련된 일은 얼마나 했나.
“1998년도에 제가 태어나 자란 도봉구에 처음으로 복지관이 생깁니다. 당시 저는 목사로서 지역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2002년도에 방아골복지관 관장으로 와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는데다 목회도 같이할 수 있겠다 싶어 비상근 관장으로 하겠다며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복지관 일이 생각보다 너무 방대하고 많아서 두 가지 일을 도저히 같이 할 수가 없어서 목회를 사임했습니다. 2004년 8월 들어 상근 복지관 관장으로 일하기 시작해 2016년 7월까지 복지 영역에서 일을 했습니다.”
목사→현장 복지→주택관리사장으로 변신
임 사장은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듯 하다. “지금도 개발이 덜 된 곳이지만 어릴 때만 해도 가마때기집, 루핑집(천막집), 판잣집이 즐비한 동네였습니다. 정말 철거민, 실향민, 빈곤, 민중 이런 단어들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아버지(87)가 목회를 한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이타적인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육성회비를 제때 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야, 목사는 말이야, 교인들보다 가난해서도 안 되지만 부자여서도 안 돼’라고 하셨죠. 제가 육성회비를 제대로 내지 못한 것도 아버지가 말한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 목회를 했다고?
“학부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대학원에 가서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됐습니다. 사실, 아버지처럼 가난한 사람과 어울려 목회활동을 하는 데 자신이 없어서 학부에서는 신학 대신 사회사업학과(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 자연스럽게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참여하다가 4학년 때 후배들이 ‘선배들 가운데 누가 학교 남아서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대학원에 갈 사람을 찾으니 제가 …. 당시 저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시는 가난한 사람, 민중적인 목회 활동하고, 소위 말하는 학생운동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이런 생활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서 사회문제와 노동과 빈민들을 위한 신학인 민중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습니다.”
“92 목회 생활로 사회 첫발 … 빈자 위한 목회 고민
‘목사는 교인보다 가난해도, 부자도 안돼’ 아버지 소신
학생운동과 아버지 목회 활동 차이 고민하다 목사 길
아버지, 은퇴 앞두고 후임 제의 …1주일 고민 끝에 거절”
2015년 서울시사회복지 신년하례식. 임성규 사장 페이스북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1992년도에 고향인 도봉구에서 개척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로서 지역사회 운동과 시민사회나 복지 이런 것을 어떻게 민중적으로 재해석해 목회활동에 접목해야 하나하고 고민하며 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2004년 아버님이 은퇴를 앞두고 아들이 눈에 밟히신듯 저보고 ‘후임으로 왔으면 좋겠다’며 제안하셨습니다. 아버지가 1959년 개척한 교회를 평생 한 자리에서 45년간 목회 활동을 한 교회였고, 교인은 500명이 넘는 중견교회였습니다. 제가 1주일가량 고민하다 ‘아버님, 이건 아무리 뭐라 그래도 세습입니다. 제가 어떻게 가겠습니까, 안 갑니다. 아버지 만나시려고 하는 장로님들에게 (아들을 후임 목사로 추천한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아들아,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 복지관의 역할을 많이 바꿨다던데.
“당시만 해도 복지관은 개인과 가족에 맞춘 사례관리와 상담 등 공급자 중심이며, 전문가 중심의 작은 복지였습니다. 그런 것이 이젠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 주민조직과 지역사회운동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예를 든다면 이전의 전통적인 재가복지 방식으로 어르신들이 불편하면 사회복지사가 어르신을 모시고 병원에 가요.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국으로 가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 어르신을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리는 거예요. 이때 병원에 사람들이 많다거나 약국에 사람이 붐비면 많이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2000년대 초반, 복지관에서 하는 재가복지의 유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적극적인 주민이 참여하는 방식인 ‘효플러스네트워크’를 만든 겁니다. 먼저 동네에서 의사·약사·한의사 15명 정도로 구성된 ‘의료인 모임’을 만듭니다. 이중 가장 적극적인 의사 2명은 1주일에 두 번씩 왕진 가방을 메고 점심시간에 어르신댁에 방문해요. 그리고 의사의 왕진을 받지 못한 어르신들은 아무 때나 병원에 오실 수 있게 해 주시고, 그래서 그 처방전을 약사에게 전달해주면 약사는 약을 받아서 복지관에 갖다주고, 복지관이나 지역 사회 활동가들이 그것을 어르신들에게 갖다 드리는 것이죠. 그런데 어르신들은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여성들, 가정주부들을 대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의사와 간호사에게서 응급처치 교육을 받아서 1주일에 2회 이상 가정방문을 하고 말동무를 하고, 건강을 체크하고…. 또 ‘도우기’라 해서 아버지들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도배·장판·전기·수도 이런 전문 기술을 가진 동네 아버지들의 모임인데, 이분들이 한 달에 한 가정씩 집수리를 해주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이 대개 반지하에 살거든요. 눅눅하고 냄새가 나고 주거환경이 안 좋잖아요. 또 이런 모임들이 서로 선순환 하는 구조를 만들고 사회복지사들은 이 주민모임이 잘 돌아가게 만들면 됩니다. 이게 결국은 지역사회 주민들, 전문성을 가진 주민들을 조직하고, 조직된 사람들이 지역사회의 문제에 참여하게 하는 네트워크 방식으로 진행한 거예요.”
- 상당히 선진적이었다.
“방아골복지관은 당시 복지계에서는 관심의 대상이었던 거죠. 실습을 하게 되면, 보통은 4주인데, 저희는 6주 정도 했죠. 그래도 실습생 대기자가 많을 정도로 지원자가 많았죠. 그만큼 사회복지계에서 유명한 복지관이 됐습니다. 서울시 평가에서 제일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7년 방아골복지관의 실천사례집을 엮어 만든 ‘신명나는 지역복지 만들기’라는 책도 사회복지계에서는 센세이셔널 하고, 사회복지사들과 풀뿌리 활동가들이 많이 읽은 책이었죠. 그러나 당시 구청장에 의해 자신 편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위탁에서 제외됐습니다. 복지를 하면서 지역사회의 풀뿌리 시민단체의 중심에 일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 서울시복지재단 대표이사로도 있었는데.
“네, 2012년부터 4년 반 동안 일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니 많은 사람이 제게 ‘박원순 서울시장과 어떤 관계냐’고 묻더라고요. 신명나는 지역복지 만들기 추천서를 써주시기는 했지만 사실 별다른 인연이 없습니다. 아마도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에서 실천하며 성과를 만든 경험을 서울시 차원에서 넓게 시도해 보라는 메시지라고 보았습니다. 서울시복지재단 4년 반동안 ‘마을지향 복지관’, ‘사회복지 공익법지원센터’, ‘금융복지상담센터’, ‘찾아가는동주민센터’ 등 굵직한 사업을 만들어 내고 시도해 본 아주 중요한 협업과 융합의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관장 재직한 방아골복지관 활동 선진적… 복지계 관심
서울시복지재단 대표 갔더니, 박원순 시장과 관계 초점
방아골복지관 성공스토리 서울 전체로 확대하란 메시지
목회-복지-주택관리, 어려운 사람 위해 사는 의미 비슷”
2013년 서울시복지재단과 일본 나고야 복지대학과의 MOU. 임성규 사장 페이스북
- 목회에서 복지, 다시 주택관리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굴절되고 어려운 분들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그 분들 삶의 질을 한 차원 높인다면 면에서는 목회와 복지, 주택관리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편적 복지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보편적 복지가 생활 속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는 복지가 좀 더 광의적인 의미에서 마을 지향의 일을 지역사회로 확대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울롱도까지 사업장이 있는 주택관리공단을 통해 전국적으로 복지와 주거복지를 협업의 구조로 만들어 좀 더 촘촘히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마을의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주민들의 자발성을 확보하고 이것을 삶의 기본인 주거와 복지를 협업의 구조로 전국화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택관리공단도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입주민들을 찾아가서 이들과 호흡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복지관도 공급자 중심에서 벗어나 주민이 참여하고 주민이 중심인 마을 지향의 복지관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