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원 유자명, 南·北·中 3국서 유공자 된 유일한 독립운동가
3부 고난의 행군: 이동 시기 ③ 한국광복군 창설1940년 9월 17일 중국 쓰촨성 충칭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태극기와 함께 중화민국 국기가 내걸려 있다. 한국광복군 설립에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됐음을 알 수 있다.
서울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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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난성 성도인 창사의 조선혁명당 옛터. 1938년 5월 6일 이곳에서 우파 진영의 정당 통합을 논의하던 김구가 첫 번째 권총 저격을 받는 ‘난무팅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진열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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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의 주거지역인 마원령.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를 비롯해 임정 요인 가족들이 살던 곳이다. 김구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은 후난성 정부의 도움으로 이곳과 난무팅 등에서 거주했다.
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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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중·일 전쟁이 한국 독립에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봤다. 그간 항일 투쟁에 미온적이던 국민당 정부가 일본과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어 일본의 패망이 앞당겨질 것으로 판단해서였다. 당시 임정이 동포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여러 문건에 이런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중·일 전쟁의 시작은 우리의 독립 전쟁이 성공할 시기에 도착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적(일본)은 중국의 저항 능력을 과소평가했고 러시아의 내부 모순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판단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가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망령되게 단정했기 때문에 중국대륙을 침략한 것이다.”(1937년 12월)
1932년 상하이 윤봉길 의거 직후 서울로 압송된 안창호(1878~1938)도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유언처럼 일본의 미래를 예견했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중·일 전쟁)을 시작했기에 반드시 이 전쟁으로 패망한다.”
창사 종합병원인 샹야의원(현 중난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난무팅 사건 당시 가슴에 총격을 입은 김구는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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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우파 진영부터 힘을 모았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속했던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통합하기 위해 나섰다. 이들은 1938년 5월 6일 조선혁명당 당사인 난무팅에 모였다. 만주에서 창당한 조선혁명당에서 이청천(1888~1957)과 유동열(1879~1950), 과거 임정의 여당 역할을 한 한국독립당에서 조소앙(1887~1958)과 홍면희(1877~1946), 한국국민당에서 김구와 이동녕(1869~1940)이 각각 참석했다. 한참 통합 논의를 벌이던 때였다.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생몰연대 미상)이 회의장에 뛰어들어 권총을 난사했다. 이것이 김구가 첫 번째 저격을 받은 `난무팅(남목청) 사건’이다.
1938년 창사 샹야의원에서 총상에서 회복된 김구(오른쪽)가 의료진과 함께 찍은 사진. 그의 가슴 가운데에 총탄 자국(원)이 선명하다.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김구가 1949년 지인에게 증정한 ‘백범일지’ 친필 서명본. 총상 후유증으로 나타난 수전증이 글씨체에 반영돼 있다. 김구는 이 글씨체를 농담 삼아 ‘총알체’라고 불렀다.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제공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제공
이운한은 첫 발을 김구에게 쐈다. 애초부터 그를 타깃으로 범행에 나선 것 같다. 중국에 의존하던 한국국민당이 우파 통합을 주도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운한은 중국 감옥에 있다가 탈옥한 뒤 종적을 감췄다. 일각에서는 그가 일제의 밀정이 아니었나 의심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가 밀정이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난무팅 사건은 서로 힘을 모아야 할 한인 독립운동세력 간 갈등이 극에 달해 자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 창설… 中과 항일 전쟁
이 시기 임정 안팎에서는 “2차 국공합작으로 중국 공산당이 팔로군을 갖춘 것처럼 조선 민족도 독립된 부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졌다. 장제스도 1938년 말부터 독립운동계 대표 격인 김구와 김원봉(1898~1958), 유자명(1894~1985)을 따로 불러 단결을 촉구했다. 한인 세력의 분열을 막고 이들을 무장해 중국의 항일 전쟁 체계에 편입하기 위해서다.
사회주의 계열이 먼저 나섰다. 일본인 반제국주의 혁명가 아오야마 가즈오(1907~1997)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조선의용대 편성 아이디어를 냈다. 조선인 독립부대를 창설해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이 지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국민당이 이를 받아들여 1938년 10월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후베이성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김원봉이 대장을 맡았다.
장쑤성 난징의 밍양가에 자리잡은 후자화원. 1935년 7월 김원봉 등이 결성한 좌파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난징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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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작성된 임정 문서에는 광복군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돼 있다. 광복군 대원 출신인 독립운동가 김득명(1923~2009)은 “이것도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타내고자 상당히 부풀려진 수”라고 증언했다. 현재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600명에 가깝다. 이 때문에 “상당수가 가짜”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가보훈처도 이런 지적을 의식해 올해부터 가짜 독립유공자 색출을 위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창사의 후난농업대학 안에 자리잡은 독립운동가 유자명의 옛집. 현재 그의 제자들이 사비를 모아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하고 있다.
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차 찾아간 후난성 창사의 후난농업대학. 넓은 캠퍼스를 걸어 한참을 들어가니 제2, 제3 강의동 사이 잔디밭에 부드러운 인상의 학자 흉상 하나가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남북한과 중국 세 나라에서 모두 유공자가 된 유일한 독립운동가 유자명이다. 캠퍼스 안 그의 옛집 터에는 제자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관을 짓고 있었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유자명은 세계적인 농학자로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라며 “비유하건대 우리나라에서 우장춘(1898~1959)에 해당하는 국보급 과학자”라고 소개했다.
남북한과 중국에서 모두 인정받는 독립운동가 유자명.
무장 투쟁에 뜻을 품고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 가입해 신채호(1880~1936) 등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노선에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나석주(1892~1926)가 1926년 12월 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겠다고 하자 톈진까지 찾아가 그에게 직접 돈과 폭탄, 권총을 건넸다.
유자명은 탁월한 어학 능력과 국제 감각으로 좌파 진영을 대표하는 인재로 손꼽혔다. 1930년대에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을, 194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학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교육부 등) 차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해방 뒤 한국전쟁 등으로 귀국 시기를 놓치자 후난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벼의 기원이 중국 남서부 윈구이 고원 일대라는 것을 밝혀냈다. 세계 농학계도 이를 정설로 인정하는 추세다. 중국 남부는 기후가 습하고 병충해도 많아 포도 재배에 적절하지 않았지만 그가 수십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신품종을 개발했다. 현재 중국 남부는 해마다 포도를 네 차례까지 수확할 수 있는 세계적 산지로 탈바꿈했다. 그가 개량한 포도로 빚은 와인이 지금도 중국에서 생산된다.
난징·창사·전장·구이린·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2019-02-07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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