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영웅’ 故 김영옥 대령
한국·유럽·미국서 훈장받은 유일한 군인과감한 결단력으로 독일군 포로 생포
장군이 부관 계급장 떼어내 달아주기도
6·25전쟁 휴전선 60㎞ 북상시킨 주역
한국 고아 돌보고 美한인 권익 위해 애써
200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랑스 총영사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은 김영옥 대령. 연합뉴스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했고 한국과 미국, 유럽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 전투에선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권력을 쥐기보다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휴머니스트. 고(故) 김영옥(1919~2005) 대령입니다.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24일 김영옥 평화센터와 일대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저자 한우성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에 따르면 김영옥은 독립운동가 김순권씨의 아들로, 1919년 1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로 입대했다가 장교가 됐지만, 그가 배치된 곳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100보병대대였습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미국 442연대 100보병대대 기록영상. 끝장을 보라!(go for broke!)는 구호를 채택한 부대답게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김영옥 대령은 100대대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미 재향군인센터 영상 캡처
1943년 100대대는 유럽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상륙했습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에 방어선인 ‘구스타프 라인’을 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적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포로가 절실했습니다.
대대 작전참모인 김영옥 중위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계가 느슨한 아침에 적진을 돌파해 포로를 잡아오겠다”고 나섰습니다. 실제로 부대원 1명만 데리고 갈대밭을 기어가 적 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은 그의 초인적인 성과와 낮은 계급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무공훈장 수여식에서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내 김영옥에게 전달하고 직접 진급을 지시했습니다. 그는 피사와 로마 해방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중령 시절의 故 김영옥 대령
●프랑스·한국에서도…수많은 공적 쌓아박갑룡 송원대 교수가 쓴 ‘휴머니스트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 연구’ 논문에 따르면 100대대 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리더십을 잊지 못해 그를 따랐습니다. 직접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며 달리는 등 늘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나베 다카시게는 “그는 항상 전선에 있었고, 선봉에 있었다”며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환준 김영옥 평화센터 사무국장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훗날 그의 휠체어를 끌며 존중하고 따랐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겸손·헌신·용기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리처드 윈터스 예비역 소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이런 공로로 이탈리아에서 ‘동성무공훈장’과 최고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프랑스에서 십자무공훈장과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한국군은 물론 미군 중에서도 이렇게 많은 훈장을 받은 이는 없습니다. 그는 강력한 포병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술을 자주 써 미군 전술 교본 변화에도 공헌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을 향해 75㎜ 무반동포를 쏘는 미군들. 서울신문 DB
그는 정보 수집 업무를 맡으며 ‘한국인 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1951년 5월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는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참전해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북상한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캔자스선’(38도선 인근의 전술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끈 부대는 휴전선을 60㎞ 위로 밀어올리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부하에게 주라” 훈장 거부한 군인진격이 너무 빠른 나머지 미군의 오폭을 받고 부상했지만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료받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공로로 미국에서 동성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등을 받았고, 한국·유럽에서 받은 훈장까지 합하면 주요 무공훈장만 19개나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적을 뽐내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 당시 특별무공훈장을 주려는 연대장에게 “훈장은 받을만큼 받았다. 부하들에게 주라”며 거부했습니다. 일대기를 쓴 한 전 이사장이 취재차 무공훈장을 몇 개나 받았는지 물어보자 “잊어버리고 세어보지도 못했다”며 차고 구석 종이상자에 넣어둔 은성무공훈장을 꺼내 보여줄 정도였습니다.
6·25 전쟁영웅 故 김영옥 대령의 조카인 다이앤 맥매스 씨가 24일 낮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군·유엔군 참전유공자초청 오찬에서 삼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9.6.24 연합뉴스
전투 중에도 장병 1인당 50센트씩을 모아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에 전달했습니다. 유엔군 중 특정 고아원에 지원금을 준 부대는 김영옥의 부대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美 한인 동포 돕는데 여생을 바치다1972년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을 돕는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미국 최대 소수인종 비영리 보건기관인 ‘한인건강정보센터’와 ‘한미연합회’를 설립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을 설득해 미 캘리포니아주 의회 위안부 결의를 돕고,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조사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늘 “나는 100%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원했던 ‘참군인’이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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