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일방적 승리 주장…해병대 ‘전투’ 공식 요청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의 포격으로 철모가 불타는지도 모른 채 북한 해안포기지를 향해 대응 사격을 하다 부상당한 임준영 상병의 모습. 왜 ‘연평도 포격전’으로 재평가해야 하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연평도 공동취재단
지난 1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는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 합동묘역 안장식이 거행됐습니다. 서정우 하사는 2009년 2월 해병대에 입대해 해병대 연평부대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중화기중대에서 81㎜ 박격포 사수로 복무하다 2010년 11월 23일 마지막 휴가를 받아 부두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포격 소식이 전해지자 급히 차량을 타고 부대로 복귀했고, 방공호를 300여m 남겨둔 지점에서 뛰어가다 떨어진 포탄에 파편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2010년 8월 해병대에 입대한 문광욱 일병은 본부중대 운전병이었습니다. 사격 훈련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대피호 밖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서 하사와 문 일병은 사병 제3묘역에 안장됐습니다. 하지만 기존 묘역 공간이 협소하고 위치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유족들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413구역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 옆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서해수호 3대 묘역’에 두 병사의 묘역이 마련된 것입니다.
묘역 앞에는 ‘여기 연평도 포격전 참전 해병 고이 잠들다’라는 내용의 표지석이 세워졌습니다. 묘비에는 ‘연평도 포격 도발’이라는 명칭 대신 ‘연평도 포격전 참전’이라는 문구가 들어갔습니다. 연평도 포격을 북한의 일방적인 ‘도발’이 아닌 ‘전투’로 재평가하기 위한 작업이 본격화한 것입니다.
●일방적 도발? 그들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해병대 사령부는 지난 9월 ‘연평도 포격 도발’로 돼있는 공식 명칭을 ‘연평도 포격전’으로 변경해 달라고 국방부에 건의했습니다. 일방적으로 북한에 공격당한 것이 아니라 연평부대가 적극적으로 대응사격을 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전투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국방부도 요청을 접수해 명칭 변경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중히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김민석 대변인은 지난 19일 정례브리핑에서 “정부 차원에서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아직 결론이 나진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북한은 이미 연평도 포격 사건을 ‘연평도 포 사격 전투’로 규정하고 지난해와 2013년 11월 23일 황해남도 강령군에서 기념집회를 열고 승전 선언을 했습니다. 민가를 집중 포격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기습공격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포격 사건 5주기 다음날인 24일에는 국방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아무리 당한 패전이 참혹하고 창피하다고 해도 시인할 것은 스스로 시인해야 한다”면서 “불바다에 잠겼던 연평도의 그날을 상기하기가 괴로우면 다시 도발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남한 당국이) 어용매체를 동원해 우리 군대가 10여명이나 사망하고 수십명이 심한 부상을 당했다는 황당무계한 거짓말까지 꾸며 여론에 내돌렸다”면서 “사실 겁에 질려 쏘아댄 놈들의 눈먼 포탄 파편 하나가 들판에 있던 한마리 황소의 뒷다리에 박혔을 뿐”이라고 우리 군의 전투성과를 깎아내렸습니다. 해병대 입장에서는 격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만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승전 선언을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해병대 연평부대 K-9 진지에서 한 해병대원이 북한의 기습적인 공격에 긴급 대응 사격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북한은 해병대 장병의 대응을 깎아내리고 자신들이 승전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방부 제공
문제도 있었습니다. 해병대의 계속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군은 2010년이 돼서야 육군이 사용하던 14년된 대포병 레이더(AN/TPQ-37)를 서해 도서지역 최초로 연평도에 배치한 바 있습니다. 이 레이더는 최초 무도를 북한군의 공격지점으로 설정해놨기 때문에 정보를 받은 연평부대 K-9 자주포는 포탄 50여발을 무도로 쐈습니다. 다시 북한군 공격지점이 개머리 진지라는 것을 확인한 뒤 30여발을 대응사격했습니다. K-9 자주포 6문 가운데 2문은 북한군의 1차 공격 때 피격돼 전자회로 장애를 일으켰고 1문은 사격훈련 때 불발탄이 끼이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탄이 쏟아지는 위급한 상황에도 사격통제 장치 기능장애를 일으켰던 1문을 불과 20분 안에 긴급 수리해 대응사격을 하는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개머리 진지 사격이 정밀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일부 있었지만, 레이더의 문제였을 뿐 연평부대 장병들은 평소 수없이 훈련한대로 최선을 다해 원점을 타격했습니다.
국방부가 ‘도발’을 ‘전투’로 재평가하는데 고심하는 이유는 적의 피해 규모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2 연평해전도 재평가를 통해 늦게나마 승전으로 격상한 만큼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제2연평해전은 ‘승전’으로 재평가
지난 6월 한민구 국방장관은 2002년 6월에 일어난 제2연평해전을 ‘승전’으로 확인했는데요. 6월 29일 평택 2함대 사령부에서 열린 제2 연평해전 13주년 기념식 추모사에서 “우리 장병들이 북한의 도발을 온몸으로 막아낸 승리의 해전”이라면서 “우리 영해를 한 치도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과시한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밝혔습니다. 전투 당시 고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해 우리 측 피해가 큰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이후 북한군은 13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하는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돼 재평가가 이뤄졌습니다. 당시 북한의 초계정 ‘등산곶 684호’는 반파된 채로 퇴각했습니다.
연평도 포격 사건도 공식적인 집계가 나오진 않았지만 북한 전문매체 등에서는 북한군 10여명이 우리 대응사격으로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북한의 피해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 노동신문도 2011년 4월 30일 정론에서 ‘연평도 사건’을 언급하면서 “원수의 총탄에 피 흘리며 쓰러진 병사를 안아 일으켜 자기의 피를 수혈해주는 사람들이 오늘의 황해남도 농민들”이라고 밝혀 군의 피해를 사실상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포격전으로 인정하면 북한이 서해 도서 지역을 분쟁지역화하는 전략에 휘말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발’만 강조할 경우 북한이 모든 상황을 주도한 공격이라는 이미지로 남을 수 있어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해병대 사령부는 지난 9월 국방부에 ‘연평도 포격 도발’을 ‘연평도 포격전’으로 변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일단 국방부는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사진은 연평도 해안 경계근무를 서는 해병대 장병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해병대 장병들의 헌신 잊지 말아야
북한군은 사건 이후 서북 도서에서 더이상 도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은 지난 22일 서남전선군사령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서해 열점지역에서 아군 수역을 목표로 한 남조선 군부의 해상사격이 강행되는 경우 5개 섬 수역에 대한 우리 서남전선군 부대들의 무자비한 응징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난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 5주기를 맞아 진행한 해병대 K-9 포격 훈련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현용 기자의 밀리터리 인사이드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밀리터리 인사이드는 핫한 아이템을 가지고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아래 리스트를 보세요. |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