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용 기자의 밀리터리 인사이드] 제비뽑기로 군대 가는 나라…군입대 하면 기뻐하는 나라

[정현용 기자의 밀리터리 인사이드] 제비뽑기로 군대 가는 나라…군입대 하면 기뻐하는 나라

정현용 기자
정현용 기자
입력 2015-10-02 22:54
수정 2015-10-0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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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군복무 추첨 제도

우리에게 동남아 국가 ‘태국’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관광’일 겁니다. ‘아시아의 진주’로 불리는 푸껫부터 치앙마이, 파타야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춰 전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군사적으로도 나름 주목할 만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 군사력 비교 사이트 ‘글로벌 파이어 파워’(GFP)에 따르면 정규군 30만 6000명(한국 62만명)으로 데이터를 취합한 106개 국가 중 20위(한국 7위)에 랭크돼 있습니다. 한 해 국방 예산은 우리나라의 6분의1 수준인 54억 달러(약 6조 3600억원)입니다. 남과 북이 대치해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있는 우리와 비교할 수준은 못 됩니다만, 동남아시아 해군 중 유일하게 항공모함(헬기항모)을 보유하고 있고 F16 전투기도 운용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황태자 피스트 디스퐁사-디스쿨 소장을 사령관으로 육군 3650명, 해군 2485명, 공군 45명을 파병했고 T50 고등훈련기를 수입하는 등 우리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참 재미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징병제 국가인데 뭔가 다릅니다. 우리는 군 면제자가 극소수여서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군대 가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운을 시험해야 한답니다. 군 면제자를 비난할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바로 운을 시험하는 과정이 ‘제비뽑기’이기 때문입니다.
태국에서는 군 입대 판정을 반기는 이들이 많다. 높은 보수와 군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 때문이다. 병역 판정을 받은 남성이 징병담당관과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  유튜브 영상 캡처
태국에서는 군 입대 판정을 반기는 이들이 많다. 높은 보수와 군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 때문이다. 병역 판정을 받은 남성이 징병담당관과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
유튜브 영상 캡처


●검은색·빨간색 종이… ‘신의 손’이 운명 가른다

제비뽑기로 군대 가는 나라라니. 어찌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죠.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물의 축제 ‘송끄란 축제’를 앞둔 4월 초 태국 전역이 들썩들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제비뽑기가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체검사는 통과해야 합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겠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즐거운 표정으로 이 황당한 행사에 참가합니다.

제비뽑기함에 슬쩍 손을 넣고 종이를 하나 쥡니다. 빨간색 종이를 뽑았다면? 당신은 군대를 가야 합니다. 반대로 검은색 종이는 면제라고 하네요. 색상이 있는 종이 대신 작은 글씨가 쓰인 종이나 구슬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슬아슬할 것 같지만 징집될 확률은 20% 정도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 결과는 그 자리에서 통보해 주는데요. 오히려 면제 판정을 받은 이들 가운데 낙담한 이가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상당수 남성이 징집 대상이 됐다는 얘기에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하는데요. 징병 담당자를 부둥켜안기까지 합니다.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데요. 왜 그럴까요.

●대졸 초임 수준의 대우+ 숙식… 치열한 경쟁

우리나라는 연간 징집 가능 인구가 68만명으로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군대를 가야 합니다만, 태국은 상황이 다릅니다. 태국에서는 남성이 21세가 되면 징집 대상이 됩니다. 인구 6770만명인 태국은 해마다 징집 대상이 되는 남성이 104만명에 달합니다. 군 복무자의 3배가 넘기 때문에 모두가 나라의 부름을 받을 순 없겠죠.

군의 대우도 좋습니다. 태국의 대졸자 초임은 월 1만~1만 2000밧(약 32만~39만원) 수준입니다. 가정을 꾸려 그럭저럭 먹고살 정도가 되는 수입이 1만 5000밧(약 48만원)입니다. 그런데 군에서 숙식을 제공하면서 월 3200~9000밧(약 10만~29만원)을 준다고 하니 솔깃할 수밖에 없겠죠. 병장 기준 17만원을 받는 우리와 비교해도 병사에게는 적지 않은 돈입니다. 아니, 국민소득과 물가를 감안하면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받는 셈이죠. 빨간색 종이를 뽑고도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자원입대하는 게 낫지 않냐”고 말씀하실 분이 있을 텐데요. 네. 자원입대도 가능합니다. 단, 복무 기간이 짧습니다. 징병되면 2년, 자원입대는 6개월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들 중에는 차라리 뽑기를 잘해서 더 오랜 기간 군에서 복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트랜스젠더는 대부분 징병을 원하지 않지만, 신체검사부터 제비뽑기까지 모든 징병 과정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한다. 단, 성기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는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신체검사를 받으며 징병담당관과 대화하는 트랜스젠더.  유튜브 영상 캡처
트랜스젠더는 대부분 징병을 원하지 않지만, 신체검사부터 제비뽑기까지 모든 징병 과정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한다. 단, 성기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는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신체검사를 받으며 징병담당관과 대화하는 트랜스젠더.
유튜브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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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원빈’으로 불리는 배우 마리오 마우러가 제비뽑기로 군 면제 판정을 받은 직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태국은 검은색 종이를 뽑으면 면제, 빨간색 종이를 뽑으면 입대하는 독특한 징병제도를 갖고 있다.  유튜브 영상 캡처
‘태국의 원빈’으로 불리는 배우 마리오 마우러가 제비뽑기로 군 면제 판정을 받은 직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태국은 검은색 종이를 뽑으면 면제, 빨간색 종이를 뽑으면 입대하는 독특한 징병제도를 갖고 있다.
유튜브 영상 캡처


●연예인·트랜스젠더도 제비뽑기 예외 없어

그럼 트랜스젠더는 어떨까요. 태국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성 소수자라기보다는 그냥 일반 여성이나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군 복무를 원할 리는 없겠죠. 그래서 여성으로 살아왔다는 이력을 증명하면 신체검사 과정에서 복무 면제 판정을 받습니다. 2010년까지는 일괄적으로 ‘심리 이상자’로 분류해 군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됐는데요. 트랜스젠더 권익 단체가 문제를 제기해 다음해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태국은 트랜스젠더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1형은 외형이 전형적인 남성인 사람, 2형은 가슴 수술을 한 사람, 3형은 성기 수술을 한 사람입니다. 3형만 면제이고 1형과 2형은 징병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성기 수술은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형과 2형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당수의 트랜스젠더가 제비뽑기를 해야 하는 것이죠. 결과가 좋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 빨간색 종이를 뽑아 군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죠.

보통 젊은이들과 달리 수입이 많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는 군 입대를 바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비뽑기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관문입니다.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국의 원빈’으로 불리는 배우 마리오 마우러도 올해 4월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마리오 마우러는 영화 ‘시암의 사랑’, ‘피막’, ‘잔다라 더 비기닝’ 등의 히트작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뽑기 결과는 검은색 종이였습니다. 팬들은 물론 징병 담당자까지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할 정도였죠. 마우러도 살짝살짝 웃음을 내비치긴 했지만 대체로 진지한 자세로 징병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결과를 보고 속으론 기분이 무척 좋았겠죠.

그룹 2PM의 멤버 닉쿤도 제비뽑기로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고 잘못 알려졌는데요. 닉쿤은 2009년 군 지원자가 너무 많이 몰려 추첨을 하기도 전에 면제 판정을 받았습니다. 닉쿤이 참여한 제비뽑기 영상은 실제 뽑기를 촬영하지 못한 현지 매체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이라고 합니다.

●방송국까지 보유한 軍… 막강한 영향력

태국은 1932년 혁명으로 전제군주 국가에서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했습니다. 하지만 정국은 늘 불안했고, 지금까지 군부 쿠데타만 19번이나 일어났습니다. 군 수뇌부는 이 과정에서 모두가 주목하는 엘리트 집단으로 부상했죠. 군부는 지난해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주축인 탁신 일가를 권력의 중심에서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지난 5월 10개월 만에 계엄령을 해제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방콕 시민들은 “계엄령 때문에 탁신 일가 찬반 시위가 일어나지 않아서 좋았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육군참모총장 출신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총선 대신 “국민이 원하면 2년 더 집권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군은 해마다 홍수 피해 복구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 데다 농민 교육과 치안을 담당해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태국 육군은 놀랍게도 6대 TV 방송국 가운데 시청률이 높은 방송국 1곳(BBTV CH7)을 직접 소유하고 있는데요. 전국의 200여개 라디오 방송국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합니다. 높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인 육군사관학교의 인기도 어마어마합니다. 올해 육사 예과 입학시험은 200명을 뽑는 데 1만 8000명이 지원해 무려 900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junghy77@seoul.co.kr
2015-10-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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