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외국인들도 곰탕, 설렁탕, 삼계탕 등 우리 고유의 뜨끈한 탕반(장국밥) 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제법 즐긴다. 하지만 아직도 눈치를 보며 손사래를 치는 게 돼지국밥(사진)과 육개장이다. 돼지국밥의 약간 비릿한 냄새나 육개장의 얼얼한 매운맛이 낯설 것이다. 허연 국물에 이름도 모르는 고기 내장 부위가 보이고, 시뻘건 국물에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데 왜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두 장국밥은 알뜰하게 최고의 영양을 챙길 수 있는 보양식이다.
돼지국밥은 돼지 뼈와 머릿고기 등으로 곤 육수에 내장 등 잡육을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이며 밥을 토렴해 먹는다. 토렴이란 밥을 담은 그릇에 국물을 부었다 빼는 것을 반복하면서 탱글한 밥알에 국물이 배도록 하는 조리법이다. 국밥에는 삶은 잡육을 삼베 보자기에 싸서 누른 뒤 가지런히 썬 제육편육을 넣기도 한다. 여기에 새우젓, 부추, 양파 등을 곁들이고, 먹을 땐 풋고추나 시큼한 깍두기도 제격이다. 본래 순대를 넣으면 순대국밥이라고도 하지만 순대는 만들기가 까다롭기 때문에 부산 등 경남 지역에선 머릿고기와 오소리감투라는 별칭을 지닌 위장, 허파, 염통, 간, 곱창 등을 넣는다. 이를 또는 내장국밥이라고도 한다.
육개장은 본래 개고기와 대파, 고춧가루 등으로 땀을 흠뻑 내면서 즐기던 보양식이었다. 개고기는 식용을 하는 데 호불호가 갈리니까 조선 후기 궁중 등에서 소고기의 양지머리로 대체됐다. 마늘, 숙주, 부추, 고사리 등 약성이 강한 채소에 고춧가루와 고추장, 고추기름을 넣고 팔팔 끓인다. 듬뿍 넣은 채소의 단맛이 부드러우면서 얼큰한 감칠맛을 낸다. 이를 우리는 “시원하다”고 표현한다.
오래전부터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주로 사육되던 돼지가 갑자기 남쪽인 부산에 나타나 돼지국밥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더 아래로 내려가 제주나 오키나와에 돼지가 등장했던 사연은 무엇일까.
우선 6·25전쟁 직후 부산엔 함경도에서 배를 타고 남하한 피란민이 많았다. 돼지국밥이나 순대는 그들의 고유 음식이다. 부산에 밀집된 미군 부대에서 돼지고기의 안심, 등심 등 질 좋은 살코기를 제외한 뼈나 잡육이 쏟아져 나왔고, 이를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으로 재현했다. 1000만 관객을 자랑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이 매끼 돼지국밥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1960~70년대엔 경제 부흥기를 맞은 일본에서 돼지고기의 등심과 안심으로 만드는 돈까스가 유행하는 덕분에 김해 등지에 수출용 축산단지가 조성되기도 했다. 헐값에 버려지는 돼지 잡육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부산에선 허름한 돼지국밥 골목이 맛집 순례 코스이기도 하다.
제주에서는 이른바 ‘똥돼지’가 유명하다. 지금은 인분을 먹여 키우진 않고, 대신 기름지고 쫄깃한 식감의 수입종 흑돼지가 제주를 대표한다. 제주 북부의 삼성혈에는 선사 시대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는 3명의 신이 땅에서 솟구쳐 탐라왕국을 건국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을나’는 고구려의 고위 직함이다. 고씨는 고구려 왕족이고, 양씨는 양만춘 장군처럼 중국 요동 지방의 군벌 세력이다. 또 부씨는 평양의 지방 토호 세력이다.
고구려 역사에서 서로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던 3개 집안의 어떤 이와 그 식솔이 섬나라의 특성상 문명 발전이 뒤졌던 제주에 느닷없이 등장한 것은 본국의 변란을 피해 망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만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면 곧장 제주 북부에 닿는다. 이때 고향에서 즐기던 돼지고기가 함께 전해졌을 것이다. 이어 고려 때 몽골에 의해 돼지 사육이 더 활발했을 수도 있다. 오키나와의 돼지 불고기는 제주 등에 머물다가 추격을 피해 탈출한 몽골 저항군 삼별초의 후손들에 의해 개발됐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육개장은 서울(한양)에서 발원한 음식이나, 늘 더운 날씨에 시달리던 대구·경북 사람들에 의해 이열치열 식의 명물 음식이 된 듯하다. 소고기는 남하한 돼지고기와 달리 벼농사가 발달한 아시아 남방에서 북상했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선 소고기를 먹었으나, 평양 등에선 돼지고기를 즐겼다. 일제강점기 때 경북에는 소 사육장이 많았다.
골목의 허름한 가게에서 손마디가 굽은 주인 할머니가 말없이 국자로 퍼주는 돼지국밥이나 육개장도 언젠가는 그 시대 주인공들의 입맛에 맞게 바뀌겠지만, 음식 문명의 뿌리는 꼭 흔적을 남긴다.
<야성은 빛나다> 시인 최영철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 바닥 곳곳에 풀어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육개장은 본래 개고기와 대파, 고춧가루 등으로 땀을 흠뻑 내면서 즐기던 보양식이었다. 개고기는 식용을 하는 데 호불호가 갈리니까 조선 후기 궁중 등에서 소고기의 양지머리로 대체됐다. 마늘, 숙주, 부추, 고사리 등 약성이 강한 채소에 고춧가루와 고추장, 고추기름을 넣고 팔팔 끓인다. 듬뿍 넣은 채소의 단맛이 부드러우면서 얼큰한 감칠맛을 낸다. 이를 우리는 “시원하다”고 표현한다.
오래전부터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주로 사육되던 돼지가 갑자기 남쪽인 부산에 나타나 돼지국밥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더 아래로 내려가 제주나 오키나와에 돼지가 등장했던 사연은 무엇일까.
우선 6·25전쟁 직후 부산엔 함경도에서 배를 타고 남하한 피란민이 많았다. 돼지국밥이나 순대는 그들의 고유 음식이다. 부산에 밀집된 미군 부대에서 돼지고기의 안심, 등심 등 질 좋은 살코기를 제외한 뼈나 잡육이 쏟아져 나왔고, 이를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으로 재현했다. 1000만 관객을 자랑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이 매끼 돼지국밥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1960~70년대엔 경제 부흥기를 맞은 일본에서 돼지고기의 등심과 안심으로 만드는 돈까스가 유행하는 덕분에 김해 등지에 수출용 축산단지가 조성되기도 했다. 헐값에 버려지는 돼지 잡육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부산에선 허름한 돼지국밥 골목이 맛집 순례 코스이기도 하다.
제주에서는 이른바 ‘똥돼지’가 유명하다. 지금은 인분을 먹여 키우진 않고, 대신 기름지고 쫄깃한 식감의 수입종 흑돼지가 제주를 대표한다. 제주 북부의 삼성혈에는 선사 시대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는 3명의 신이 땅에서 솟구쳐 탐라왕국을 건국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을나’는 고구려의 고위 직함이다. 고씨는 고구려 왕족이고, 양씨는 양만춘 장군처럼 중국 요동 지방의 군벌 세력이다. 또 부씨는 평양의 지방 토호 세력이다.
고구려 역사에서 서로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던 3개 집안의 어떤 이와 그 식솔이 섬나라의 특성상 문명 발전이 뒤졌던 제주에 느닷없이 등장한 것은 본국의 변란을 피해 망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만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면 곧장 제주 북부에 닿는다. 이때 고향에서 즐기던 돼지고기가 함께 전해졌을 것이다. 이어 고려 때 몽골에 의해 돼지 사육이 더 활발했을 수도 있다. 오키나와의 돼지 불고기는 제주 등에 머물다가 추격을 피해 탈출한 몽골 저항군 삼별초의 후손들에 의해 개발됐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육개장은 서울(한양)에서 발원한 음식이나, 늘 더운 날씨에 시달리던 대구·경북 사람들에 의해 이열치열 식의 명물 음식이 된 듯하다. 소고기는 남하한 돼지고기와 달리 벼농사가 발달한 아시아 남방에서 북상했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선 소고기를 먹었으나, 평양 등에선 돼지고기를 즐겼다. 일제강점기 때 경북에는 소 사육장이 많았다.
골목의 허름한 가게에서 손마디가 굽은 주인 할머니가 말없이 국자로 퍼주는 돼지국밥이나 육개장도 언젠가는 그 시대 주인공들의 입맛에 맞게 바뀌겠지만, 음식 문명의 뿌리는 꼭 흔적을 남긴다.
<야성은 빛나다> 시인 최영철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 바닥 곳곳에 풀어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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