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먼 옛날부터 떡국과 만둣국을 먹었다. 떡은 우리말이고 만두라는 단어도 우리말에서 유래한 한자어다. 고조선 무렵 조리 기술이나 도구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엔 지금처럼 쌀로 밥을 짓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둥근 질그릇에서 찐 떡을 주식으로 삼았다. 떡은 그대로 두면 굳기 때문에 딱딱해진 가래떡을 국물과 함께 끓여서 부드러운 맛을 내기도 했을 것이다. 유구한 떡국이 새해를 여는 정월 초하룻날 조상과 가족이 함께 나눠 먹는 제례·명절 음식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설날 아침엔 한복이나 단정한 설빔을 차려입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 뒤 음식과 술로 음복을 한다. 자녀는 부모와 어른께 세배를 하며 덕담을 듣는다. 때마다 가족이 모여 조상을 받드는 제사 문화가 중국이나 유교에서 전해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본래부터 우리 고유의 것이었고, 아직도 한국인이 거의 유일하게 전통을 지키고 있다.
가래떡은 하룻밤 정도 굳힌 다음에 납작하게 어슷썰기를 해야 바닥에 들러붙지 않는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떡을 동전 모양처럼 썬 것으로 나온다. 국물은 소의 사골이나 양지머리, 사태를 푹 고아서 하는 게 일반적이다. 양지머리는 건져서 가늘게 손으로 뜯어 고명으로 얹는다. 꿩고기나 닭고기를 넣기도 하고 옛 궁중에서는 소 도가니로 국물을 낸 뒤 등심 산적을 고명으로 썼다. 고기 외에도 계란 지단이나 김 가루, 삶은 토란 등을 넣기도 한다.
옛 개성의 부잣집에서는 조랭이떡으로 만든 떡국을 즐겼다. 떡은 잘록한 허리의 눈사람 모양인데, 정성이 더 들어간 떡국이다. 길함을 뜻한다는 누에의 고치 모양처럼 떡을 빚은 것이라는 속설이 있지만 조랭이떡의 탱글탱글한 식감이 가래떡보다 낫기 때문일 것이다. 부유한 상인들이 많이 살던 개성의 고급 떡국이다. 양반은 한양에 더 많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치부를 멀리했기 때문에 맑은 국물에 소박한 모양의 떡국을 으뜸으로 여겼다.
옛 실담어에서 떡은 ‘덕흐’(dugha)라고 발음되며 ‘굳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우유가 버터나 치즈로 굳는 것도 그렇게 표현했다. 그래서 우리말에 ‘머리가 떡 지다’라는 말이 아직 남아 있다. 여기서의 ‘떡’을 표준국어대사전은 ‘머리 따위가 한데 뭉쳐서 잘 펴지지 않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정의하고 있다. 뭉치고 굳어졌다는 의미다. 이처럼 떡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말에 흔적을 남겼는데, 우리말과 실담어의 연관성 연구는 여전히 외면받고 있다. 고어에서 만두는 ‘만한 두흐’(mahn-duh)라고 했다. ‘밀가루로 껍질(만두피)을 말아서 만든, 맛있는 음식’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만두는 본래부터 밀가루 음식이었던 것이다.
쌀로 빚은 떡은 동남아시아, 말레이 반도, 오키나와, 규슈 등 주로 쌀농사를 짓던 남방계의 음식이다. 반면 밀가루로 빚은 만두는 근·중동아시아, 몽골, 만주 등 북방계의 먹거리다. 따라서 떡국은 한반도 남부와 중국 남서부, 일본 등지에서 즐겼고 만둣국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 북동부에서 먹었다. 두 이질적인 음식이 만나는 지점이 가운데 위치인 서울, 개성 등이었다. 영호남이 고향인 노인들은 설날에 만둣국을 먹지 않았다. 반면 탈북민들은 남한에 와서야 떡국을 처음 봤다고 한다. 아울러 서울에서는 떡과 만두를 모두 넣은 떡만둣국을 즐겼다. 오묘한 음식 문명사가 아닐 수 없다.
만둣국은 다진 숙주와 양파, 으깬 두부, 양념한 돼지고기 등을 소로 쓴다. 1980년대쯤 당면이 등장해 만두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국물은 국간장이나 멸치 육수 등으로 맑고 심심하게 낸다. 평양식 만두는 주먹만 한 크기에 피가 꽤 두꺼워 두어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모양은 손으로 대충 꾹꾹 눌러 조금 볼품없어 보이지만 고기를 듬뿍 다져 넣은 소가 별미다. 개성식 만두는 크기가 작고 피도 얇으며, 깔끔한 모양의 반달형이다. 흡사 유럽 시칠리아의 라비올리와 비슷한 느낌도 난다. 개성 만두에는 기름에 살짝 볶은 여러 채소가 많이 들어간다. 만두가 서울에 도착하면 피가 더욱 얇아지고 작은 만두의 양끝을 이어붙여 다소곳한 모양을 냈다. 오랜 역사가 담긴 설맞이 상차림이다.
<오른손이 아픈 날> 시인 김광규
밤새도록 오른손이 아파서
엄지손가락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설 상 차리는 데 오래 걸렸어요
섣달그믐날 시작해서
설날 오후에 떡국을 올리게 되었으니
한 해가 걸렸네요
엄마 그래도 괜찮지?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가래떡은 하룻밤 정도 굳힌 다음에 납작하게 어슷썰기를 해야 바닥에 들러붙지 않는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떡을 동전 모양처럼 썬 것으로 나온다. 국물은 소의 사골이나 양지머리, 사태를 푹 고아서 하는 게 일반적이다. 양지머리는 건져서 가늘게 손으로 뜯어 고명으로 얹는다. 꿩고기나 닭고기를 넣기도 하고 옛 궁중에서는 소 도가니로 국물을 낸 뒤 등심 산적을 고명으로 썼다. 고기 외에도 계란 지단이나 김 가루, 삶은 토란 등을 넣기도 한다.
옛 개성의 부잣집에서는 조랭이떡으로 만든 떡국을 즐겼다. 떡은 잘록한 허리의 눈사람 모양인데, 정성이 더 들어간 떡국이다. 길함을 뜻한다는 누에의 고치 모양처럼 떡을 빚은 것이라는 속설이 있지만 조랭이떡의 탱글탱글한 식감이 가래떡보다 낫기 때문일 것이다. 부유한 상인들이 많이 살던 개성의 고급 떡국이다. 양반은 한양에 더 많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치부를 멀리했기 때문에 맑은 국물에 소박한 모양의 떡국을 으뜸으로 여겼다.
옛 실담어에서 떡은 ‘덕흐’(dugha)라고 발음되며 ‘굳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우유가 버터나 치즈로 굳는 것도 그렇게 표현했다. 그래서 우리말에 ‘머리가 떡 지다’라는 말이 아직 남아 있다. 여기서의 ‘떡’을 표준국어대사전은 ‘머리 따위가 한데 뭉쳐서 잘 펴지지 않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정의하고 있다. 뭉치고 굳어졌다는 의미다. 이처럼 떡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말에 흔적을 남겼는데, 우리말과 실담어의 연관성 연구는 여전히 외면받고 있다. 고어에서 만두는 ‘만한 두흐’(mahn-duh)라고 했다. ‘밀가루로 껍질(만두피)을 말아서 만든, 맛있는 음식’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만두는 본래부터 밀가루 음식이었던 것이다.
쌀로 빚은 떡은 동남아시아, 말레이 반도, 오키나와, 규슈 등 주로 쌀농사를 짓던 남방계의 음식이다. 반면 밀가루로 빚은 만두는 근·중동아시아, 몽골, 만주 등 북방계의 먹거리다. 따라서 떡국은 한반도 남부와 중국 남서부, 일본 등지에서 즐겼고 만둣국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 북동부에서 먹었다. 두 이질적인 음식이 만나는 지점이 가운데 위치인 서울, 개성 등이었다. 영호남이 고향인 노인들은 설날에 만둣국을 먹지 않았다. 반면 탈북민들은 남한에 와서야 떡국을 처음 봤다고 한다. 아울러 서울에서는 떡과 만두를 모두 넣은 떡만둣국을 즐겼다. 오묘한 음식 문명사가 아닐 수 없다.
만둣국은 다진 숙주와 양파, 으깬 두부, 양념한 돼지고기 등을 소로 쓴다. 1980년대쯤 당면이 등장해 만두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국물은 국간장이나 멸치 육수 등으로 맑고 심심하게 낸다. 평양식 만두는 주먹만 한 크기에 피가 꽤 두꺼워 두어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모양은 손으로 대충 꾹꾹 눌러 조금 볼품없어 보이지만 고기를 듬뿍 다져 넣은 소가 별미다. 개성식 만두는 크기가 작고 피도 얇으며, 깔끔한 모양의 반달형이다. 흡사 유럽 시칠리아의 라비올리와 비슷한 느낌도 난다. 개성 만두에는 기름에 살짝 볶은 여러 채소가 많이 들어간다. 만두가 서울에 도착하면 피가 더욱 얇아지고 작은 만두의 양끝을 이어붙여 다소곳한 모양을 냈다. 오랜 역사가 담긴 설맞이 상차림이다.
<오른손이 아픈 날> 시인 김광규
밤새도록 오른손이 아파서
엄지손가락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설 상 차리는 데 오래 걸렸어요
섣달그믐날 시작해서
설날 오후에 떡국을 올리게 되었으니
한 해가 걸렸네요
엄마 그래도 괜찮지?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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