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을 절망해보지 않고는 진실한 삶을 모른다
‘강으로 내려가 본 적이 있는가/새벽 두 시에 홀로/강가에 앉아/버림 받은 기분에 젖어본 일이 있는가/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신이여 축복하소서/사랑하는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그녀가 태어나지 말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
할렘강으로의 나들이/새벽 두시/ 한 밤중/홀로/신이시여, 나 죽고만 싶어요/하지만 나 죽은들 누가 서운해 할까’
‘할렘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미국의 흑인시인 랭스턴 휴즈(1902-1967)의 ‘할렘강 환상곡’이란 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페이스북에 소개된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를 읽다가 가슴을 후빈 詩다. 이 시를 소개한 천양희 시인의 말마따나 ‘인생을 절망해보지 않고는 진실한 삶을 모른다’는 말이 와 닿는다. 그의 표현처럼 뭉크의 ‘절규’같은 시 한편이 영혼을 벼락치듯 울린다.
우리는 한번쯤 강가에 서서,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에 서서, 한번쯤 서럽도록 슬프게 울음을 삼켜본 적 있다. 앞이 캄캄해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 해서, 그 절망의 시간 앞에서 속울음을 삼키다가 꺼억꺼억 소리내며 하얀 포말같은 거품을 토해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버림받아 슬픈게 아니라 혼자라는 사실이 서글퍼 슬프다는 것을…
# 버림받은 듯한, 날 것 같은 오름 남송이오름에서 만난 황소 3마리
오설록, 그 녹차밭 옆의 오름. 바람을 잠재우고,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을 만져주게 하는 남송이오름은 ‘할렘강 환상곡’처럼 사람들로 부터 버림받은 듯, 날 것 같은 오름이었다. 초입부터 외길인데다 풀이 무성해 조그마한 주차장 언덕까지 좁은 길을 속력을 내고 달릴 수 밖에 없다. 클랙슨(경적)을 울리고 누군가에게 쫓기듯 질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도에 누군가와 마주치면 베스트 드라이버도 하기 싫은 수십미터 내리막을 후진해야 하는 낭패를 당하기 때문이다. SUV 차량 한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외길 끝에 도달하는 것부터 버림받은 곳으로 향해 가는 기분이 든다.
쓸쓸하고 외로운 오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산책길을 걸어간다. 찌는 듯한 여름이어서인지 사람 인기척 조차 없다. 100여m 걷자, 황소 3마리가 산책로를 점령해 나를 째려본다. 마치 ‘우리 구역을 침범하지 말라. 네가 여기 왜 왔느냐’ 따지듯 노려본다. 좁은 산책로를 어떻게 지나갈까 잠시 고민한다. 혹시 발길에 차이는 게 아닐까, 뿔에 찔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밀려든다. 물론 나는 입에서 나도 모르게 워~워~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두 마리 황소가 산책로 옆 낮은 풀 속으로 피했고, 앞에서 버티던 황소는 내가 어찌하나 시험하듯 가만히 서 있었다.
용기를 내 스틱을 휘두르며 전진하자, 그때서야 양보하듯 옆으로 피했다. 나도 모르게 “건들지 않을게. 길을 내줘서 고마워”라는 독백이 새어나왔다. 주인이 바뀐 산책로였다. 곳곳에 황소들이 배설해 놓은 영역 표시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언제부터 버림받은 오름이 됐을까. 봄을 지나면서부터 일까. 하늘 높이 솟은 길게 뻗은 나무 기둥에 세워진 밧줄(아마도 밧줄타기 훈련하는 장소)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항공우주박물관이 보이고 평화로로 가는 도로가 슬몃슬몃 보였다.
#한여름 바람만한 선물이 또 있을까… 솔개를 닮았다고 남소로기라고 불렸던 오름누가보면 무더위에 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산책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버림받은 처량한 모습으로 비춰졌을 지 모른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처럼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워’서, 아니면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하지 않는 ‘내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들통나서 빨개졌는 지도 모른다.
오름의 반을 돌 무렵에 나타나는 편백나무와 삼나무 숲길에 들어서기 전까지, 버림받은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었다. 편백나무 숲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숲을 지나니 탐방로 표지판이 나오고 이윽고 나무계단이 시작됐다. 장마가 끝난 7월의 제주는 바람마저 누군가가 훔쳐가 버린 습했다. 바람은 그리운 사람처럼 아주 이따금씩 내뺨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뻥 뚫린 정상엔 바람이 쉬고 있을까.
제주시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산 31에 자리한 남송이오름의 높이는 339m이다. ‘오름나그네’ 저자 김종철님의 말마따나 ‘남쪽에서 보는 얼굴은 반달같이 둥그스름한데 동서쪽에서는 산머리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능선이 꼬리를 끌고 옆구리의 굼부리도 드러나 보인다. 남사면에서 서사면에 걸쳐 솔숲이 우거졌다.’
북서쪽으로 터진 대향 말굽형 분화구를 주축으로 북측 능선 허리에 형성된 원형분화구와 그 북쪽에 소로기촐리라고 불리는 알오름으로 구성된 복합화산체로 한라산국립공원 외부지역에 위치한 오름치고는 꽤 높은 오름이라고 표지판에서 안내하고 있다. 남송이오름은 한자로 남송악(南松岳)으로 적는데 지형이 날개를 펼친 소로기(솔개)를 닮았다고 해서 남소로기라고 불리는 오름으로 북측을 소로기촐리라고 부르는 오름이라 부른단다.
예로부터 이 오름은 솔개 형체이고 북서쪽 저지오름은 닭 형체라 했단다. 두 오름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훤히 내다보인다. 솔개와 닭, 저지 쪽에서는 남소로기에 숲이 짙어 기가 세어지면 마을에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친다고 언짢아한 나머지 이에 맞서기 위해 저지악에 나무를 심어서 기를 승하게 하는 한편 남소로기에 와서 불을 질러 기를 못펴게 했단다.
정상에는 산불초소 위에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잠자던 바람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온 듯 춤을 추고 있었다. 몸이 날아갈 듯 시원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오름, 시력잃은 퇴역장교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알 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1993년작)처럼 불현듯, 바람과 손잡고 탱고(Por una cabeza)를 추고 싶었다. 그 명대사처럼 용기를 내서. “스텝이 엉켜야 탱고니까. 인생과 달리 탱고는 단순하니까. 설혹 실수한다 해도 다시 추면 되니까.”
무더운 여름에 바람보다 고마운 선물이 있을까. 그 탱고의 선율에 맞춰 버림받은 오름이 퇴역장교 알 파치노처럼 바람과 함께 탱고를 추고 있었다. 남쪽 신화월드에서 불어온 바람이 서쪽 오설록 녹차밭의 녹차 한잎을 한번 흔들고 사라졌다.
#버림받은 땅을 연간 150만명 관광객이 찾는 땅으로… 오설록이 한폭의 수채화처럼하산길. 사실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오설록 녹차밭은 한폭의 유화처럼 다가온다. 서광 차밭 오설록은 대기가 한라산을 지나며 많은 구름과 안개를 형성하고, 이는 자연 차광 효과를 내 찻잎의 색을 좋게 만든단다. 온화한 기후와 자연 차광 효과는 고급 품질의 차를 만들 때 더없이 좋은 생육 조건이란다. 돌밭으로 작물재배가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오설록은 1983년부터 20여 년간 개간하여 현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광활한 유기농 차밭이 되었다. 차밭 주변에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차문화 박물관인 오설록 티뮤지엄이 자리잡고 있다.
이 티박물관에 가면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창립하고 이끈 장원 서성환 선대회장의 오랜 꿈과 도전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좋은 땅은 누구나 개발할 수 있잖아요. 이 땅은 우리가 아니면 황무지가 됩니다. 당장 큰 이익을 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차 문화를 되살려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후에 우리사업에도 더 지나면 제주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라며 내세울 만한 차(茶) 문화가 없던 한국에 녹차를 우리 고유의 차로 키워내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버림받은 땅이, 외면받던 땅이 이젠 연간 15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핫플레이스로 거듭났다. 버림받은 인생은 없다. 버림받았다고 절망하지 않기를….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서부권 여름철 대표 피서지 제주 신화월드
오름을 오르기 전날, 제주기자협회 해녀포럼 겸 토론회가 있어 제주신화월드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2018년 3월에 공식 개장한 제주신화월드는 프리미엄 호텔 브랜드, 테마파크, 워터파크를 포함한 놀이시설, 도내에서 두 번째로 큰 다목적 컨벤션센터, 60여개의 브랜드가 입점된 신세계 프리미엄 전문점, 외국인 전용 카지노 등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리조트로 꼽힌다.
서귀포 서부권 관광휴양 필수코스로 사랑받고 있는 곳. 그 가운데 단연 힙한 곳은 신화워터파크. 캐나다의 프로슬라이드 테크놀러지사가 아시아 최초로 선보인 워터 슬라이드 ‘슈퍼 크리퍼 코일’은 극강의 스릴감을 선사한다. 오름산책으로 피로를 풀고 싶다면 제주에서 아름다운 계곡 중 하나인 돈내코를 모티브로 3개의 폭포수가 떨어지는 온수풀 ‘릴렉싱 스파’, 몸을 푹 담그고 전신 마사지를 할 수 있는 ‘루프 가든 바데풀’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토론회 참석 차 이곳에 온 나는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졌고 해녀전시회(양종훈 사진작가전)까지 이어져서 취재하느라 훌쩍 저녁을 넘기고 말았다. 토론회에선 갑자기 해녀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불현듯 떠올라 눈물을 삼켜야 했다. 숨비소리를 들을 때까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갯바위의 소년이 떠올라서이기도 했다. 수십년 전 해녀들의 삶은 척박한 삶이었고, 헐거운 삶이었고, 벗어나고 싶은, 버림받은 삶 같았다. 그러나 지금 해녀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 국내외 유산 등재 4관왕에 빛난다. 인생을 절망해본 사람만이 진실한 삶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걸 명징하는 듯 하다.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차밭 오설록 너머로 남송이오름이 보인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산 31 남송이오름이 녹차밭과 어우러지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신이여 축복하소서/사랑하는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그녀가 태어나지 말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
할렘강으로의 나들이/새벽 두시/ 한 밤중/홀로/신이시여, 나 죽고만 싶어요/하지만 나 죽은들 누가 서운해 할까’
‘할렘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미국의 흑인시인 랭스턴 휴즈(1902-1967)의 ‘할렘강 환상곡’이란 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페이스북에 소개된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를 읽다가 가슴을 후빈 詩다. 이 시를 소개한 천양희 시인의 말마따나 ‘인생을 절망해보지 않고는 진실한 삶을 모른다’는 말이 와 닿는다. 그의 표현처럼 뭉크의 ‘절규’같은 시 한편이 영혼을 벼락치듯 울린다.
우리는 한번쯤 강가에 서서,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에 서서, 한번쯤 서럽도록 슬프게 울음을 삼켜본 적 있다. 앞이 캄캄해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 해서, 그 절망의 시간 앞에서 속울음을 삼키다가 꺼억꺼억 소리내며 하얀 포말같은 거품을 토해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버림받아 슬픈게 아니라 혼자라는 사실이 서글퍼 슬프다는 것을…
<37>오설록 녹차밭 품은 남송이오름
# 버림받은 듯한, 날 것 같은 오름 남송이오름에서 만난 황소 3마리
여름 풀들이 무성해지면서 소들이 점령한 남송이오름 산책로는 마치 버림받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쓸쓸하고 외로운 오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산책길을 걸어간다. 찌는 듯한 여름이어서인지 사람 인기척 조차 없다. 100여m 걷자, 황소 3마리가 산책로를 점령해 나를 째려본다. 마치 ‘우리 구역을 침범하지 말라. 네가 여기 왜 왔느냐’ 따지듯 노려본다. 좁은 산책로를 어떻게 지나갈까 잠시 고민한다. 혹시 발길에 차이는 게 아닐까, 뿔에 찔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밀려든다. 물론 나는 입에서 나도 모르게 워~워~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두 마리 황소가 산책로 옆 낮은 풀 속으로 피했고, 앞에서 버티던 황소는 내가 어찌하나 시험하듯 가만히 서 있었다.
용기를 내 스틱을 휘두르며 전진하자, 그때서야 양보하듯 옆으로 피했다. 나도 모르게 “건들지 않을게. 길을 내줘서 고마워”라는 독백이 새어나왔다. 주인이 바뀐 산책로였다. 곳곳에 황소들이 배설해 놓은 영역 표시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언제부터 버림받은 오름이 됐을까. 봄을 지나면서부터 일까. 하늘 높이 솟은 길게 뻗은 나무 기둥에 세워진 밧줄(아마도 밧줄타기 훈련하는 장소)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항공우주박물관이 보이고 평화로로 가는 도로가 슬몃슬몃 보였다.
남송이오름 산책로애서 만난 밧줄, 편백나무숲, 정상으로 가는 계단. 제주 강동삼 기자
#한여름 바람만한 선물이 또 있을까… 솔개를 닮았다고 남소로기라고 불렸던 오름누가보면 무더위에 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산책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버림받은 처량한 모습으로 비춰졌을 지 모른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처럼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워’서, 아니면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하지 않는 ‘내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들통나서 빨개졌는 지도 모른다.
오름의 반을 돌 무렵에 나타나는 편백나무와 삼나무 숲길에 들어서기 전까지, 버림받은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었다. 편백나무 숲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숲을 지나니 탐방로 표지판이 나오고 이윽고 나무계단이 시작됐다. 장마가 끝난 7월의 제주는 바람마저 누군가가 훔쳐가 버린 습했다. 바람은 그리운 사람처럼 아주 이따금씩 내뺨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뻥 뚫린 정상엔 바람이 쉬고 있을까.
제주시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산 31에 자리한 남송이오름의 높이는 339m이다. ‘오름나그네’ 저자 김종철님의 말마따나 ‘남쪽에서 보는 얼굴은 반달같이 둥그스름한데 동서쪽에서는 산머리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능선이 꼬리를 끌고 옆구리의 굼부리도 드러나 보인다. 남사면에서 서사면에 걸쳐 솔숲이 우거졌다.’
북서쪽으로 터진 대향 말굽형 분화구를 주축으로 북측 능선 허리에 형성된 원형분화구와 그 북쪽에 소로기촐리라고 불리는 알오름으로 구성된 복합화산체로 한라산국립공원 외부지역에 위치한 오름치고는 꽤 높은 오름이라고 표지판에서 안내하고 있다. 남송이오름은 한자로 남송악(南松岳)으로 적는데 지형이 날개를 펼친 소로기(솔개)를 닮았다고 해서 남소로기라고 불리는 오름으로 북측을 소로기촐리라고 부르는 오름이라 부른단다.
예로부터 이 오름은 솔개 형체이고 북서쪽 저지오름은 닭 형체라 했단다. 두 오름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훤히 내다보인다. 솔개와 닭, 저지 쪽에서는 남소로기에 숲이 짙어 기가 세어지면 마을에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친다고 언짢아한 나머지 이에 맞서기 위해 저지악에 나무를 심어서 기를 승하게 하는 한편 남소로기에 와서 불을 질러 기를 못펴게 했단다.
정상에는 산불초소 위에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잠자던 바람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온 듯 춤을 추고 있었다. 몸이 날아갈 듯 시원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오름, 시력잃은 퇴역장교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알 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1993년작)처럼 불현듯, 바람과 손잡고 탱고(Por una cabeza)를 추고 싶었다. 그 명대사처럼 용기를 내서. “스텝이 엉켜야 탱고니까. 인생과 달리 탱고는 단순하니까. 설혹 실수한다 해도 다시 추면 되니까.”
무더운 여름에 바람보다 고마운 선물이 있을까. 그 탱고의 선율에 맞춰 버림받은 오름이 퇴역장교 알 파치노처럼 바람과 함께 탱고를 추고 있었다. 남쪽 신화월드에서 불어온 바람이 서쪽 오설록 녹차밭의 녹차 한잎을 한번 흔들고 사라졌다.
남송이오름 정상 남쪽으로 펼쳐지는 제주신화월드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남송이오름 정상 전망대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버림받은 땅을 연간 150만명 관광객이 찾는 땅으로… 오설록이 한폭의 수채화처럼하산길. 사실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오설록 녹차밭은 한폭의 유화처럼 다가온다. 서광 차밭 오설록은 대기가 한라산을 지나며 많은 구름과 안개를 형성하고, 이는 자연 차광 효과를 내 찻잎의 색을 좋게 만든단다. 온화한 기후와 자연 차광 효과는 고급 품질의 차를 만들 때 더없이 좋은 생육 조건이란다. 돌밭으로 작물재배가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오설록은 1983년부터 20여 년간 개간하여 현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광활한 유기농 차밭이 되었다. 차밭 주변에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차문화 박물관인 오설록 티뮤지엄이 자리잡고 있다.
이 티박물관에 가면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창립하고 이끈 장원 서성환 선대회장의 오랜 꿈과 도전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좋은 땅은 누구나 개발할 수 있잖아요. 이 땅은 우리가 아니면 황무지가 됩니다. 당장 큰 이익을 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차 문화를 되살려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후에 우리사업에도 더 지나면 제주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라며 내세울 만한 차(茶) 문화가 없던 한국에 녹차를 우리 고유의 차로 키워내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버림받은 땅이, 외면받던 땅이 이젠 연간 15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핫플레이스로 거듭났다. 버림받은 인생은 없다. 버림받았다고 절망하지 않기를….
남송이오름 옆 오설록 티 뮤지엄 앞에 세워진 컵 모양 조형물. 제주 강동삼 기자
연간 관광객 150만명 이상이 찾는 오설록 티뮤지엄에서 각양각색의 티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쇼핑하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 제주 강동삼 기자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 앞 정원에 세워진 녹차꽃을 형상화한 오승열 작가의 ‘고(苦) 감(甘) 산(酸) 함(咸) 삽(澁)’. 녹차가 지닌 쓰고 달고 시고 짜고 떫음을 의미하며 작가는 너무 인색하지 말고 너무 티나게도 너무 복잡하게도 너무 편하게도 너무 어렵게도 살지말라는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오설록 티뮤지엄 앞 녹차밭이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제주 강동삼 기자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서부권 여름철 대표 피서지 제주 신화월드
왼쪽부터 신화월드 리조트, 워터파크(이상 신화월드 제공), 연말까지 신화월드 곳곳에서 전시되고 있는 양종훈 작가의 해녀사진전, 신화월드 랜딩관에서 본 야외풀장. 제주 강동삼 기자
서귀포 서부권 관광휴양 필수코스로 사랑받고 있는 곳. 그 가운데 단연 힙한 곳은 신화워터파크. 캐나다의 프로슬라이드 테크놀러지사가 아시아 최초로 선보인 워터 슬라이드 ‘슈퍼 크리퍼 코일’은 극강의 스릴감을 선사한다. 오름산책으로 피로를 풀고 싶다면 제주에서 아름다운 계곡 중 하나인 돈내코를 모티브로 3개의 폭포수가 떨어지는 온수풀 ‘릴렉싱 스파’, 몸을 푹 담그고 전신 마사지를 할 수 있는 ‘루프 가든 바데풀’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토론회 참석 차 이곳에 온 나는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졌고 해녀전시회(양종훈 사진작가전)까지 이어져서 취재하느라 훌쩍 저녁을 넘기고 말았다. 토론회에선 갑자기 해녀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불현듯 떠올라 눈물을 삼켜야 했다. 숨비소리를 들을 때까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갯바위의 소년이 떠올라서이기도 했다. 수십년 전 해녀들의 삶은 척박한 삶이었고, 헐거운 삶이었고, 벗어나고 싶은, 버림받은 삶 같았다. 그러나 지금 해녀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 국내외 유산 등재 4관왕에 빛난다. 인생을 절망해본 사람만이 진실한 삶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걸 명징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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