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봥 왕 골라(가서 보고 와서 얘기해주세요)’… 거센바람은 제주인들의 말을 짧게, 거칠게 만들었다
‘화나지 않았는데도 화난 것처럼 큰 소리로 말하고, 툭툭 말을 토막 쳐 거칠게 내뱉는 사람들, 거친 땅, 거센 바람의 풍토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바람을 뚫고도 들리도록 목소리가 높아지고, 바람에 말끝이 날아가지 않게 연결어미가 축소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서 보고 와서 말하라’가 ‘강 봥 왕 말하라’가 되었다. 화산도의 거친 땅과 거센 바람이 그 고장 사람들의 심성을 거칠게 만들어놓았다면, 그 거칢과 완강함에는 먼 조상에서 유전된, 유배와 망명으로 추방당한 자의 포한도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제주의 삼다(三多) 중 바람 때문에 정말 말이 짧아진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됐다. 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를 읽으면서 가슴을 후벼파듯 공감되는 문장이었다. 제주사투리로 말할 때마다 짧아서 좋을 때가 있었다. “기?(그래?)” 바람때문이었구나. “기(그래, 맞아)”
# 3대 사찰을 다 품은 원당오름… 제주시내와 조천의 경계를 짓는 오름
원당봉으로 올라가는 내내 그랬다. 바람이 내 말을 삼켜 버렸다. 제주시 동쪽 삼양해수욕장으로 차를 몰고가다 보면 오름 하나가 눈에 띄도록 반갑게 맞이한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사라봉과 별도봉, 제주항이 펼쳐지고, 동쪽으로 조천읍 신촌리와 멀리 함덕 서우봉까지 보이는 오름이다. 제주시내와 조천읍의 경계를 짓는 오름이기도 하다.
문강사(천태종)로 가는 길목에서 둘레길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돌게 돼 있다.
3개의 능선에 7개의 봉우리가 마치 북두칠성처럼 벌려 있어 원당칠봉(일명 삼첩칠봉)이라고도 불리는 원당봉은 원나라 때 이 오름 중턱에 원나라의 당인 원당(元堂)이 있었다 하여 원당봉(오름), 조선시대때 원당봉수가 세워진 데서 망오름, 삼양동에 위치하고 있어 삼양봉이라고도 불렸다. 주봉의 높이 170.7m, 둘레 3411m에 달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남쪽 소나무 둘레길을 돌다보면 한라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힘든 줄 모른다. 동쪽 조천읍 신촌리와 멀리 함덕 서우봉까지 눈에 담고 나면 세갈래 길이 나온다. 가장 왼쪽 길인 정상으로 가는 계단으로 접어들었다. 제주다운 팽나무 몇그루를 감상하며 오르면 팔각정 전망대와 ‘원당봉에서 부르는 새천년의 노래비(정인수 시인)’가 반긴다. 2000년 1월 1일 원당봉 정상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때 시인이 직접 낭독했던 작품을 그 이듬해에 새겨놓은 노래비였다.
둘러볼 곳이 많은 나는 잠시 숨 돌리고 원래 왔던 곳으로 유턴해 되돌아간다. 갈림길중 가운데 길로 내려간다. 원당봉에는 분화구가 있는데 과거엔 습지였으나, 현재는 문강사라는 절과 연못이 조성돼 있다. 바로 그 솔밭 아래에 천태종 사찰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대웅전 옆으로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연못에는 금빛 7층탑이 비춰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 탑 아래에는 ‘이 세상에 내것이 어디있나,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다(상월원각대조사님)’란 법어가 눈에 띈다.
# 4·3의 상처만 남은 사찰들… 불탑사, 원당사이 원당봉 굼부리(분화구) 안에는 문강사(천태종) 외에 불탑사(조계종), 원당사(태고종) 등 사찰 2개가 더 있어 명당의 기운이 서려있다. 문강사에서 내려오다 보면 오른편에 불탑사와 원당사가 마주하고 있다.
조계종 사찰 불탑사는 1914년 안봉려관 스님이 고려시대 절터인 원당사지에 건물을 지어 창건했다.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사찰 대부분이 파손되었으며 1953년에 재건했다. 불탑사 경내 오른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유형문화재 1호(보물 제1187호)로 지정돼 있는 불탑사 오층석탑이 신비롭게 자리잡고 있다. 이 석탑은 1300년(충렬왕 26) 원나라 순황제가 황태자를 얻기 위해 축조했다고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현무암으로 쌓은 이 탑의 양식은 1층의 기단과 5층의 몸돌이 심하게 좁아 특이하다. 또한 1층의 남쪽 면에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이 있는 점도 독특하다. 기단면석에는 뒷면을 제외한 3개 안상 내에 같은 크기와 형식의 귀꽃문이 있다. 상륜부에는 근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보개가 올려져 있다. 원당사는 세번의 화재로 소실됐으나 석탑 안은 원형대로 남았다고 불탑사 앞 대리석 안내판에 적혀있다. 그 옆엔 원제국시대 제주도의 3대 사찰의 하나였던 원당사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특히 불탑사는 제4·3사건 당시 1948년 11월에 삼양리마을로 소개되었고 토벌대는 사람이 사용할 수 없도록 주변 나무들을 베어내고 대웅전과 요사체가 모두 뜯기고 헐렸다. 특히 대웅전은 훼손되었고 불상과 탱화는 소개된 삼양1동 민가에 임시 옮겨놓았다가 1953년에 다시 불탑사에 모셔졌단다.
불탑사와 형제처럼 사이좋게 마주 바라보는 원당사도 불탑사와 똑같이 1년 뒤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1949년 11월 삼양리 마을로 소개됐고 당시 건물 중 대웅전은 신도 중에 경찰이 있어서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6년에야 피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이미 폐허가 돼 있었다. 그후 소개됐던 부처님과 탱화 등을 모시고 돌아와 대웅전과 객실을 보수하고 재건했다고 쓰여 있다.
원당사는 실제 후사가 없던 원의 황실에 공녀로 끌려간 기씨가 황제의 총애를 입어 제2황후가 됐지만, 황자를 얻지 못해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동쪽의 바닷가 삼첩칠봉을 찾아 기도하면 이뤄진다고 해 이곳 원당봉에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다고 전해진다. 정성을 다한 기도 끝에 황자를 얻었고 이후 이곳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의 성지가 됐다고 한다.
# 진성기 선생의 민화 속에서도 불공 드려 낳았다는 원세자 등장하는구나‘지주 오름 중에도 설개에 신 원당오르믄 원당칠봉이옝 호영 아주 실영 신 오르민디 옌날 이 모실 사는 짐씨 삼대족자가 애기 어려우난 이 오름에 간 정성을 호고 산신기도 불공을 드련 원세자옝 호는 아드를 나앗젱 홉네다/ 원세자는 바당을 조아호곡 괴기 나끄레 댕기멍 보재기로 살게 되엿쑤다/세자는 괴길 나끄민 동니 아이드를 매와노왕 지비 강 머그렝 갈라주곡 호멍 사라가난 동니 사름들찌레도 펭파니 조앗쑤다/원세자가 호로은 배를 탄 먼 바당드레 갈치 나끄레 갔단 보름싸레 배가 어퍼지난 오꼿 주거비엿쑤다’
(제주오름중에도 제주시 삼양동에 있는 원당오름은 원당칠봉이라고 하여 아주 신령있는 오름인데 옛날 이 마을 사는 김씨 삼대독자가 아기 귀하니까 이 오름에 가서 정성을 하고 산신기도 불공을 드려서 원세자라고 하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원세자는 바다를 좋아하고 고기 낚으러 다니면서 어부로 살게 되었습니다/원세자는 고기를 낚으면 동네 아이들을 모여 놓고 집에 가서 먹으라고 나누어주고 하면서 살아가니까 동네 사람끼리도 평판이 좋았습니다/원세가가 하루는 배를 타고 먼 바다에 갈치 낚으러 갔다가 바람살에 배가 엎어지니까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이 글은 민속학의 대가 ‘한집’ 진성기(88) 선생의 제주대학교 문화총서에 나온 원당오름에 관한 민화의 일부분이다. 얼마전 만났던 전경수 교수가 추천한 귀한 책이었다.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4·3 소설 ‘제주도우다’ 배경 조천포, 연북정 그리고 엉장메코지4·3희생자 추념식이 다가온다. 4·3의 아픔이 서린 곳으로 떠나본다.
현기영(83) 선생의 필생의 역작 ‘제주도우다’에서 안창세는 ‘그 사건을 당하고 나서 자신의 삶은 거기에서 멈춰버린 것 같다고 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원당봉에서 바라보면 동쪽 조천 토박이다. 주인공이 살았던 조천포로 향했다. 원당봉에서 차로 10여분이면 연북정과 조천포에 다다른다. 아기자기한 마을답게 포구도 작고 아담하다. 포구로 가는 길목에 연북정이 있다.
유배되어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1560년(선조23) 당시의 조천관을 중창해 쌍벽정(雙壁亭)이라 칭하였다가 1599년(선조32)에 다시 건물을 고쳐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했다. 건물은 네모꼴에 가깝고 높이 14자의 축대 위에 동남쪽을 향해 세워져있다. 축대의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러 쌓여 있다. 이곳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瓮城)과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연북정은 망루(望樓)의 용도로 지어졌을 듯 싶다.
대하소설 ‘제주도우다’에도 비슷하게 언급된다. ‘지명도 새콧알에서 조천포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포구의 널찍한 터전에 둥그렇게 높은 돌성을 쌓아올려 조천진을 만들었다. 남쪽 성벽 위의 감시 망대에 연북정이란 이름의 정자를 세웠는데, 바다 건너 먼나먼 북녘에 있는 왕을 연모한다는 뜻이었다. 이 포구로 들어오는 유배객들은 우선 이 정자에 올라 자신을 내친 왕을 향해 그래도 사랑한다고 북향사배하곤 했다. 유배 일번지인 제주섬은 물 건너 한벌 들어오면 다시 나가기 어려운 망망대해, 거친 파도 속의 원악도(遠惡島)였다.’
연북정에선 신촌리마을과 원당봉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연북정에서 내려오면 용천수 탐방길이 눈길을 끈다. 두말치물(한번에 두말 정도의 물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 가장 먼저 반긴다. 소설 속 주인공 창세도 ‘배가 고프면 집 근처 샘물통인 두말치물에 달려가서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는 물, ‘마을의 여러 샘물통 중에 두말치물이 제일 물맛이 달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물만은 샘물통에서 펑펑 솟구쳐 언제나 풍족했다’는 용천수였다.
그리고 양진사 사찰에 있는 빌레물과 족박물은 신기할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양진사 서쪽 돌벽 틈으로 내다보는 바다는 백미다. 소설에 나오듯 물위의 감옥같은 제주 섬을, 순조때까지 무려 200년에 걸쳐 모든 포구를 출륙(出陸) 금지령으로 묶어버렸지만 조천포만은 열어놓았다. 그 담벼락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육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소설에 나오는 ‘엉장메코지’가 어디인지 찾기 위해 조천포를 빠져나와 동쪽 해안가로 차를 돌렸다. ‘조천마을 갯가에 엉장메코지라고 있주. 연북정에서 동북쪽으로 얼마쯤 걸어가면 나와. 바당으로 삐죽이 뻗어나간 곶인데, 거기에 암석들이 동산처럼 높이 쌓여 있어. 그것이 설문대할망이 제주와 육지를 연결하려고 갖다놓은 암석들이라는거라.’
실제 살짝 언덕 위에 위치한 이곳은 산책데크와 정자가 있으며 정자에서 바라보는 바디는 차갑도록 시리다. 물위의 감옥이 실감나도록 망망대해가 북쪽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육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관문 조천포의 바다, 그 수평선은 슬프도록 시린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여전히 4·3은 슬픈, 그리고 시린 기억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책방의 개념을 한순간에 깨버린 무인서점 {괄호}
제주항일기념관 옆 ‘함덕골목(해장국,내장탕전문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인근 독립서점인 무인서점을 찾아나섰다. 4·3의 흔적을 좇다보니 마음이 헛헛해졌다. 연일 쏟아지는 봄비가 그쳐 맑은 햇살이 쏟아지듯, 우울한 마음도 맑게 개이길 바랐다.
신촌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곳(신촌서5길 91)이지만, 제대로 된 간판도 없어 정말이지 포기하고 돌아갈 뻔 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서점인지 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기자기한 동네를 두세바퀴 돌고나서야 주민에게 물어보고 겨우 찾아낸 곳. 전형적인 제주 촌집이어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정도로 지붕이 낮은 허름한 집이었다. 서점이 아니라 폐가를 대충 수리해 책 몇권을 갖다놓은 수준이었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이 서점의 바닥에는 책 크기만한 구멍을 새겨 그 안에 마치 손도장 찍듯, 책틀을 만들어 놓았다. 그 틀에 낡은 책들이 누워 있었다. 책들은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빛바랜 낡고 오래된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문학동네시인선’, 헤테로토피아(미셸 푸코)’, ‘젊은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이너마리아릴케)’…. 그나마 책상 위에는 ‘모순(양귀자)’, ‘여행의기술(알랭 드 보통)’, ‘댄스댄스댄스(무라카미 하루키)’ 등 비교적 최근 스테디셀러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LP판은 ‘고장’이라고 당당하게 쓰여 있고 ‘블루투스 이용하세요’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앉지 않으면 안될 감옥같은 한평짜리 크기의 쪽방에는 기타하나 덜렁 세워져 있고 이곳을 들렀던 손님들이 흔적을 남기고 간, 포스트잇에 쓰인 글들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남긴 낙서장 같은 노트도 수십권 쌓여 있다. ‘2023.8.15~’라고 쓰여있는 노트에는 누군가가 끄적끄적 인사를 남기거나 하고 싶은 말들이 적혀 있다. 이날은 20대로 보이는 여성 혼자 조용히 앉아 17년동안 바보로 살았던 인물을 그린 ‘바보 빅터’란 책에 몰입해 있었다. 조심스레 어디서 왔는지 묻자, “스위스마을에 짐을 풀고 동네 산책삼아 왔다가 알게 됐다”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서점이라고 하기엔 책이 거의 없고, 쉼터라고 하기엔 너무나 비좁은,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난했던 친구 집의 골방보다도 못한 헌책방. 그러나 빈티지같은,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이 서점이 이날은 내게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벗처럼 다가섰다. 그 책방 이름은 { 괄호 } 다. 그 벽엔 누런 메모가 이렇게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이 평대 위의 책들은 기증받은 누군가의 소중한 책과 노트입니다. 도서관에서 대여한 소설책에서 누군가 몰래 그어둔 밑줄을 발견하게 됐을 때, 헌책방에서 꺼내든 책의 책머리에 누군가 적어둔 짧은 편지를 발견하게 됐을 때 우리는 밑줄 그은 누군가의 마음을 돌아보게 되고 책을 건네고 건네받았던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보게 됩니다. 괄호는 헌책에 대한 기억을 모아두는 장으로써 기능을 합니다. 책을 매개로, 우리는 연결될 수 있을까요?’
현기영 선생의 대하소설 ‘제주도우다’ 배경이 되는 조천포구에서 바라본 원당봉과 조천읍 해안가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 오름을 오르다가 바라본 제주시내의 모습. 멀리 사라봉과 별도봉까지 조망할 만큼 탁 트여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원당봉 오름을 오르다가 남쪽 소나무 숲 둘레길에서 바라본 한라산 전경.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의 삼다(三多) 중 바람 때문에 정말 말이 짧아진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됐다. 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를 읽으면서 가슴을 후벼파듯 공감되는 문장이었다. 제주사투리로 말할 때마다 짧아서 좋을 때가 있었다. “기?(그래?)” 바람때문이었구나. “기(그래, 맞아)”
# 3대 사찰을 다 품은 원당오름… 제주시내와 조천의 경계를 짓는 오름
원당봉 정상 전망대의 모습. 팔각정 옆에는 정인수 시인의 새천년의 노래비가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원당오름 둘레길에서 만나는 문강사(천태종) 사찰 경내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문강사 연못에 비친 7층탑. 제주 강동삼 기자
<28>4·3의 상처 깃든 원당오름
문강사(천태종)로 가는 길목에서 둘레길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돌게 돼 있다.
3개의 능선에 7개의 봉우리가 마치 북두칠성처럼 벌려 있어 원당칠봉(일명 삼첩칠봉)이라고도 불리는 원당봉은 원나라 때 이 오름 중턱에 원나라의 당인 원당(元堂)이 있었다 하여 원당봉(오름), 조선시대때 원당봉수가 세워진 데서 망오름, 삼양동에 위치하고 있어 삼양봉이라고도 불렸다. 주봉의 높이 170.7m, 둘레 3411m에 달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남쪽 소나무 둘레길을 돌다보면 한라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힘든 줄 모른다. 동쪽 조천읍 신촌리와 멀리 함덕 서우봉까지 눈에 담고 나면 세갈래 길이 나온다. 가장 왼쪽 길인 정상으로 가는 계단으로 접어들었다. 제주다운 팽나무 몇그루를 감상하며 오르면 팔각정 전망대와 ‘원당봉에서 부르는 새천년의 노래비(정인수 시인)’가 반긴다. 2000년 1월 1일 원당봉 정상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때 시인이 직접 낭독했던 작품을 그 이듬해에 새겨놓은 노래비였다.
둘러볼 곳이 많은 나는 잠시 숨 돌리고 원래 왔던 곳으로 유턴해 되돌아간다. 갈림길중 가운데 길로 내려간다. 원당봉에는 분화구가 있는데 과거엔 습지였으나, 현재는 문강사라는 절과 연못이 조성돼 있다. 바로 그 솔밭 아래에 천태종 사찰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대웅전 옆으로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연못에는 금빛 7층탑이 비춰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 탑 아래에는 ‘이 세상에 내것이 어디있나,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다(상월원각대조사님)’란 법어가 눈에 띈다.
원당오름에 자리잡고 있는 조계종 사찰 불탑사는 1914년 안봉려관 스님이 고려시대 절터인 원당사지에 건물을 지어 창건했다.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사찰 대부분이 파손되었으며 1953년에 재건했다. 현재 비구니 사찰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도 유일의 고려시대 석탑으로 1993년 11월 보물 제118호로 지정된 불탑사 경내에 있는 오층석탑의 모습. 주변에 아름드리 소나무와 팽나무등과 잘 어우러져 감동을 안겨준다. 제주 강동삼 기자
불탑사 경내에 있는 오층석탑과 종각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 4·3의 상처만 남은 사찰들… 불탑사, 원당사이 원당봉 굼부리(분화구) 안에는 문강사(천태종) 외에 불탑사(조계종), 원당사(태고종) 등 사찰 2개가 더 있어 명당의 기운이 서려있다. 문강사에서 내려오다 보면 오른편에 불탑사와 원당사가 마주하고 있다.
조계종 사찰 불탑사는 1914년 안봉려관 스님이 고려시대 절터인 원당사지에 건물을 지어 창건했다.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사찰 대부분이 파손되었으며 1953년에 재건했다. 불탑사 경내 오른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유형문화재 1호(보물 제1187호)로 지정돼 있는 불탑사 오층석탑이 신비롭게 자리잡고 있다. 이 석탑은 1300년(충렬왕 26) 원나라 순황제가 황태자를 얻기 위해 축조했다고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현무암으로 쌓은 이 탑의 양식은 1층의 기단과 5층의 몸돌이 심하게 좁아 특이하다. 또한 1층의 남쪽 면에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이 있는 점도 독특하다. 기단면석에는 뒷면을 제외한 3개 안상 내에 같은 크기와 형식의 귀꽃문이 있다. 상륜부에는 근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보개가 올려져 있다. 원당사는 세번의 화재로 소실됐으나 석탑 안은 원형대로 남았다고 불탑사 앞 대리석 안내판에 적혀있다. 그 옆엔 원제국시대 제주도의 3대 사찰의 하나였던 원당사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특히 불탑사는 제4·3사건 당시 1948년 11월에 삼양리마을로 소개되었고 토벌대는 사람이 사용할 수 없도록 주변 나무들을 베어내고 대웅전과 요사체가 모두 뜯기고 헐렸다. 특히 대웅전은 훼손되었고 불상과 탱화는 소개된 삼양1동 민가에 임시 옮겨놓았다가 1953년에 다시 불탑사에 모셔졌단다.
불탑사와 형제처럼 사이좋게 마주 바라보는 원당사도 불탑사와 똑같이 1년 뒤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1949년 11월 삼양리 마을로 소개됐고 당시 건물 중 대웅전은 신도 중에 경찰이 있어서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6년에야 피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이미 폐허가 돼 있었다. 그후 소개됐던 부처님과 탱화 등을 모시고 돌아와 대웅전과 객실을 보수하고 재건했다고 쓰여 있다.
원당사는 실제 후사가 없던 원의 황실에 공녀로 끌려간 기씨가 황제의 총애를 입어 제2황후가 됐지만, 황자를 얻지 못해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동쪽의 바닷가 삼첩칠봉을 찾아 기도하면 이뤄진다고 해 이곳 원당봉에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다고 전해진다. 정성을 다한 기도 끝에 황자를 얻었고 이후 이곳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의 성지가 됐다고 한다.
불탑사를 마주보고 있는 원당사 경내의 모습. 원당사는 태고종 사찰로 고려시대 13세기 원나라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원나라 기황후가 아들을 낳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 사찰 역시 4·3 당시 소실됐다가 다시 보수 재건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오름중에도 제주시 삼양동에 있는 원당오름은 원당칠봉이라고 하여 아주 신령있는 오름인데 옛날 이 마을 사는 김씨 삼대독자가 아기 귀하니까 이 오름에 가서 정성을 하고 산신기도 불공을 드려서 원세자라고 하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원세자는 바다를 좋아하고 고기 낚으러 다니면서 어부로 살게 되었습니다/원세자는 고기를 낚으면 동네 아이들을 모여 놓고 집에 가서 먹으라고 나누어주고 하면서 살아가니까 동네 사람끼리도 평판이 좋았습니다/원세가가 하루는 배를 타고 먼 바다에 갈치 낚으러 갔다가 바람살에 배가 엎어지니까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이 글은 민속학의 대가 ‘한집’ 진성기(88) 선생의 제주대학교 문화총서에 나온 원당오름에 관한 민화의 일부분이다. 얼마전 만났던 전경수 교수가 추천한 귀한 책이었다.
현기영 선생의 소설‘제주도우다’의 배경이 되는 조천읍 조천포구의 모습. 멀리 원당오름이 아른거린다. 제주 강동삼 기자
조천포구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연북정은 바다 건너 먼나먼 북녘에 있는 왕을 연모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정자로 현기영 선생의 ‘제주도우다’소설 배경이기도 하다. 제주 강동삼 기자
현기영(83) 선생의 필생의 역작 ‘제주도우다’에서 안창세는 ‘그 사건을 당하고 나서 자신의 삶은 거기에서 멈춰버린 것 같다고 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원당봉에서 바라보면 동쪽 조천 토박이다. 주인공이 살았던 조천포로 향했다. 원당봉에서 차로 10여분이면 연북정과 조천포에 다다른다. 아기자기한 마을답게 포구도 작고 아담하다. 포구로 가는 길목에 연북정이 있다.
유배되어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1560년(선조23) 당시의 조천관을 중창해 쌍벽정(雙壁亭)이라 칭하였다가 1599년(선조32)에 다시 건물을 고쳐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했다. 건물은 네모꼴에 가깝고 높이 14자의 축대 위에 동남쪽을 향해 세워져있다. 축대의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러 쌓여 있다. 이곳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瓮城)과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연북정은 망루(望樓)의 용도로 지어졌을 듯 싶다.
대하소설 ‘제주도우다’에도 비슷하게 언급된다. ‘지명도 새콧알에서 조천포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포구의 널찍한 터전에 둥그렇게 높은 돌성을 쌓아올려 조천진을 만들었다. 남쪽 성벽 위의 감시 망대에 연북정이란 이름의 정자를 세웠는데, 바다 건너 먼나먼 북녘에 있는 왕을 연모한다는 뜻이었다. 이 포구로 들어오는 유배객들은 우선 이 정자에 올라 자신을 내친 왕을 향해 그래도 사랑한다고 북향사배하곤 했다. 유배 일번지인 제주섬은 물 건너 한벌 들어오면 다시 나가기 어려운 망망대해, 거친 파도 속의 원악도(遠惡島)였다.’
연북정에선 신촌리마을과 원당봉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연북정에서 내려오면 용천수 탐방길이 눈길을 끈다. 두말치물(한번에 두말 정도의 물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 가장 먼저 반긴다. 소설 속 주인공 창세도 ‘배가 고프면 집 근처 샘물통인 두말치물에 달려가서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는 물, ‘마을의 여러 샘물통 중에 두말치물이 제일 물맛이 달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물만은 샘물통에서 펑펑 솟구쳐 언제나 풍족했다’는 용천수였다.
현기영 선생의 소설 ‘제주도우다’에서 나오는 용천수 두말치물의 모습. 이곳 조천포구에 오면 용천수 탐방길을 거닐다보면 조천리 마을 골목골목을 탐방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주 강동삼 기자
조천읍 조천리 용천수 탐방길에서 만나는 빌레물(위 오른쪽과 아래 왼쪽)과 족박물(아래 오른쪽)은 양진사 사찰내에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소설에 나오는 ‘엉장메코지’가 어디인지 찾기 위해 조천포를 빠져나와 동쪽 해안가로 차를 돌렸다. ‘조천마을 갯가에 엉장메코지라고 있주. 연북정에서 동북쪽으로 얼마쯤 걸어가면 나와. 바당으로 삐죽이 뻗어나간 곶인데, 거기에 암석들이 동산처럼 높이 쌓여 있어. 그것이 설문대할망이 제주와 육지를 연결하려고 갖다놓은 암석들이라는거라.’
실제 살짝 언덕 위에 위치한 이곳은 산책데크와 정자가 있으며 정자에서 바라보는 바디는 차갑도록 시리다. 물위의 감옥이 실감나도록 망망대해가 북쪽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육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관문 조천포의 바다, 그 수평선은 슬프도록 시린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여전히 4·3은 슬픈, 그리고 시린 기억이다.
양진사 경내 허물어진 담벼락에서 훔쳐보는 조천포구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책방의 개념을 한순간에 깨버린 무인서점 {괄호}
조천읍 신촌초등학교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무인서점 {괄호} 입구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무인서점 괄호 바닥에 책틀 모양에 자리잡은 책들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무인서점 괄호에는 한평크기만한 텐트 느낌의 골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행객의 모습. 벽면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낙서와 인사말들이 다닥다닥 나붙어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신촌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곳(신촌서5길 91)이지만, 제대로 된 간판도 없어 정말이지 포기하고 돌아갈 뻔 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서점인지 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기자기한 동네를 두세바퀴 돌고나서야 주민에게 물어보고 겨우 찾아낸 곳. 전형적인 제주 촌집이어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정도로 지붕이 낮은 허름한 집이었다. 서점이 아니라 폐가를 대충 수리해 책 몇권을 갖다놓은 수준이었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이 서점의 바닥에는 책 크기만한 구멍을 새겨 그 안에 마치 손도장 찍듯, 책틀을 만들어 놓았다. 그 틀에 낡은 책들이 누워 있었다. 책들은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빛바랜 낡고 오래된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문학동네시인선’, 헤테로토피아(미셸 푸코)’, ‘젊은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이너마리아릴케)’…. 그나마 책상 위에는 ‘모순(양귀자)’, ‘여행의기술(알랭 드 보통)’, ‘댄스댄스댄스(무라카미 하루키)’ 등 비교적 최근 스테디셀러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LP판은 ‘고장’이라고 당당하게 쓰여 있고 ‘블루투스 이용하세요’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앉지 않으면 안될 감옥같은 한평짜리 크기의 쪽방에는 기타하나 덜렁 세워져 있고 이곳을 들렀던 손님들이 흔적을 남기고 간, 포스트잇에 쓰인 글들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남긴 낙서장 같은 노트도 수십권 쌓여 있다. ‘2023.8.15~’라고 쓰여있는 노트에는 누군가가 끄적끄적 인사를 남기거나 하고 싶은 말들이 적혀 있다. 이날은 20대로 보이는 여성 혼자 조용히 앉아 17년동안 바보로 살았던 인물을 그린 ‘바보 빅터’란 책에 몰입해 있었다. 조심스레 어디서 왔는지 묻자, “스위스마을에 짐을 풀고 동네 산책삼아 왔다가 알게 됐다”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서점이라고 하기엔 책이 거의 없고, 쉼터라고 하기엔 너무나 비좁은,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난했던 친구 집의 골방보다도 못한 헌책방. 그러나 빈티지같은,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이 서점이 이날은 내게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벗처럼 다가섰다. 그 책방 이름은 { 괄호 } 다. 그 벽엔 누런 메모가 이렇게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이 평대 위의 책들은 기증받은 누군가의 소중한 책과 노트입니다. 도서관에서 대여한 소설책에서 누군가 몰래 그어둔 밑줄을 발견하게 됐을 때, 헌책방에서 꺼내든 책의 책머리에 누군가 적어둔 짧은 편지를 발견하게 됐을 때 우리는 밑줄 그은 누군가의 마음을 돌아보게 되고 책을 건네고 건네받았던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보게 됩니다. 괄호는 헌책에 대한 기억을 모아두는 장으로써 기능을 합니다. 책을 매개로, 우리는 연결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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