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읍 산굼부리는 11월만 되면 억새물결이 출렁인다. 제주 강동삼 기자
산굼부리 억새물결 뒤로 펼쳐지는 한라산 능선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의 늦가을은 은빛으로 출렁이는 억새 들녘에서 가장 먼저 온다. 황혼에 접어든 남자의 머릿결처럼 희끗희끗하다. 염색으로도 감출 수 없어 포기한 회갈색. 핑크빛으로 물든 핑크뮬리가 자태를 뽐내어도, 제주의 억새오름의 빛나는 은빛 물결 앞에선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그 억새물결을 산굼부리(조천읍 비자림로 768)에서 만난다면 더욱 그렇다.
산굼부리의 움푹 패인 분화구는 그 깊이가 백록담보다 깊은 132m다. 제주 강동삼 기자
# 말론 브랜도의 회색빛 머릿결처럼 헝클어진 억새물결
<19> 출렁이는 억새바다 산굼부리
흔히 말하는 ‘굼부리’는 화산체의 분화구를 가리키는 제주어다. 그래서 산굼부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된 분화구이다. 368개의 한라산 기생화산 중의 하나이지만, 다른 기생화산들과는 달리 커다란 분화구를 가지고 있는게 특징이다.
분화구는 평지보다 100m나 푹 꺼져 있다. 오르지 않아도 되는 오름이지만, 그나마 언덕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한라산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물장오리오름, 돔베오름, 큰개오리오름, 절물오름, 민오름, 지그리오름, 늡서리오름, 바농오름, 붉은오름, 마은이오름, 구두리오름, 말찻오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산굼부리가 있는 곳은 해발로 따지면 400m 이상 지점에 있다는 얘기다. 제주의 풍광을 가장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이다. 산굼부리 표고는 437.4m다. 화구 바닥은 백록담의 깊이 115m와 비교하면 더 깊은 132m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스터리한 크롭 서클처럼… 자연이 디자인해 놓은 움푹 패인 분화구
11월 중순 산굼부리의 억새물결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하지만 이 산굼부리를 5~6월에 와서 보면 마치 캐나다 오크섬의 보물이 묻힌 머니피트나 아니면 미스터리한 ‘크롭 서클’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자연이 빚은 기묘하고 신비한 원형이 마치 외계인이 디자인한 느낌까지 들기 때문이다.
이곳은 다양한 희귀식물들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분화구 식물원’이기도 하다. 산굼부리의 식생은 한라산 동부의 원식생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보호되고 있기도 하다. 지질학적 가치 또한 높아 학문적 가치가 상당한 곳으로 알려졌다.
억새물결따라 걷다보면 간혹 억새와 갈대가 헷갈리곤 한다. 쉽게 구별(산굼부리에는 억새와 갈대를 구별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친절한 표지판이 있다)하자면, 억새는 부채꼴모양의 깃털을 연상시키며 산이나 들에서 자란다. 반면 곱거나 가지런하지 못하고 더부룩하며 부드러운 갈대는 습지나 강가에서 자란다. 억새는 자주색에서 황갈색, 은빛으로 변하지만, 갈대는 자주색에서 자갈색으로 변한다. 억새는 속이 차 있고 갈대는 비어 있다.
특히 이맘때 만나는 가을의 산굼부리는 억새바다의 파도처럼 출렁인다. 푸른 하늘을 벗 삼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밭의 은빛 물결은 셔터만 눌러도 명화가 된다. 중간 중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가족이나 모임들이 너도나도 인생샷을 찍느라 소란스럽다.
조용히 ‘대부’의 주제곡처럼 ‘사랑도 부드럽게 말해야(Speak softly love)’ 할 것 같은데 그들은 신났다. 연인들은 조용히 포옹하고 있다. ‘하늘 외엔 아무도 우리 말을 듣지 못하게. 그 사랑의 맹세를(So no one hears us but the sky. The vows of love)’ 하듯.
#영화 ‘연풍연가’촬영지엔… 옥황상제의 말잣딸처럼 지상으로 내려온 사랑 이야기
산굼부리 연풍연가 촬영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산굼부리에 내려오는 전설 안내판 인근에 세워진 사슴상. 제주 강동삼 기자
전설도 내려온다. 옥황상제가 견우성, 직녀성처럼 훌륭한 별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한감’도 그 별들 중 하나였다. 옥황상제 생일날 총명하고 사랑스런 ‘말잣딸’(셋째공주)이 생일에 초대받고 온 한감과 서로 눈이 맞아버렸다. 옥황상제가 부모 허락도 없이 사랑하는 걸 알게 되자 용서할 수 없다 하여 귀양살이를 명했다.
하늘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 둘은 지상으로 내려와 어디에서 살까 고민하다가 산굼부리에 살기로 했단다. 한라산에는 온갖 짐승도 많고 나무열매도 풍성했다. 한감은 사냥을 좋아해 노루, 사슴, 오소리, 꿩들을, 말잣딸은 보리수 열매, 산딸기, 다래, 머루 등을 주식으로 삼았다. 너무 다른 식성때문에 결국 살림을 분가하게 됐다. 고약한 냄새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잣딸은 인가를 찾아 내려오다가 지금의 제주시 남문 밖 천년 팽나무 아래 이르렀단다.
현재 이곳에는 전설의 주인공처럼 사슴상이 푸른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과거엔 사냥꾼 산신제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거나 부정한 짓을 하게 되면 산신이 노해서 안개가 삽시에 덮이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한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안개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곳에선 ‘Speak softly love’ 하길 바란다.
#아주 멋진 하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산굼부리 글씨의 의자. 제주 강동삼 기자
산굼부리 매표소 안으로 들어서면 돌담위에 ‘더하기는 사랑’이란 디자인이 새겨져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돌집카페 창문에 는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라는 문구가 지나가는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제주 강동삼 기자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이 없는 까칠한 사람처럼 산굼부리는 속(분화구)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속을 다 보여주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기라도 하듯, 무성한 나무 숲이 돼버렸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은 분화구가 돼 버렸다.
돌아오는 길, 출발할 때 안 보였던 이끼가 잔뜩 낀 돌집 지붕을 만난다. 그 지붕 아래는 카페다. 거기엔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라는 글귀가 써 있다. 쉼표같은 사람, 쉼표같은 마음이 필요할 때 한번쯤 들렀다 가도 좋은 ‘굼부리’다. 거기에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만큼, 호젓함만이 감돈다.
거절못할 제안에 빠진 늦가을. 평범하지만, 멋진 하루로 기억될 것 같다. 왜냐하면 과묵한 미국의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1872.7.4~1933.1.5)가 가장 좋아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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