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강동삼의 벅차오름]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기자
강동삼 기자
입력 2023-08-05 07:55
수정 2023-08-05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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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길 쭉쭉 뻗은 삼나무 숲길은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송이화산 산책길이 호젓함을 더해준다. 제주 강동삼 기자
사려니숲길 쭉쭉 뻗은 삼나무 숲길은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송이화산 산책길이 호젓함을 더해준다. 제주 강동삼 기자
FM라디오가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 아주 오랫동안 ‘김세원의 가정음악실’에서 가끔 시낭송을 하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하곤 했다. DJ 김세원은 언제나 굵고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생소한 시들을 소개했다. 장 클로드 보렐리 ‘바다의 협주곡(Le Concerto de la Mer)’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면 감성충전 끝. 나를 곧바로 1980년대로 돌려보낸다. 마치 당시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시그널 음악같은 느낌이다.

물찻오름을 가는 길은 불현듯, 김세원이 낭송하는 정호승 시인의 ‘미안하다’ 시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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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년에  한 번 열리는 물찻오름과 사려니숲길
<11>일년에 한 번 열리는 물찻오름과 사려니숲길


#15년간 휴식년제… 일년에 딱 한번 한시적인 개방,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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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길에서 만나는 산수국과 기수기목, 물찻오름으로 가는 길과 탐방 안내소. 제주 강동삼 기자
사려니숲길에서 만나는 산수국과 기수기목, 물찻오름으로 가는 길과 탐방 안내소. 제주 강동삼 기자
난 물찻오름으로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오름은 몰라도 그 오름으로 가는 사려니숲길은 다 안다. 사려니숲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다. 그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물찻오름이 있다. 15년동안 쉬고(자연휴식년제) 있었는데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보고싶은 걸 어쩌겠니.

제주도는 한라산둘레길 국가숲길 지정과 연계한 제15회 사려니숲 에코힐링 체험행사를 지난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열었다. 2009년부터 사려니숲에서 시작한 이번 행사는 올해 15회째를 맞았다. 특히 자연휴식년제가 적용된 물찻오름은 행사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하고, 오름 훼손 방지를 위해 사전 예약자에 한해서만 입장할 수 있었다. 이 기간에 개방한다는 소식만 듣고 사전 예약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무작정 사려니숲길을 걸어갔다.

사려니숲길은 제주의 숨은 비경 31곳 중 하나로, 비자림로를 시작으로 물찻오름과 사려니 오름을 거쳐가는 삼나무가 우거진 숲길이다. 그리고 숲길 가는 내내 산수국이 지천에 널려 있다.

‘사려니’는 ‘신성한 숲’ 혹은 ‘실 따위를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라는 뜻으로 숲길을 거닐면 상쾌한 삼나무 향에 포개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빽빽한 삼나무뿐만 아니라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편백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고 있다.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기 때문에 오소리와 제주족제비를 비롯한 포유류, 팔색조와 참매를 비롯한 조류, 쇠살모사를 비롯한 파충류 등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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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길 무장애길. 제주 강동삼 기자
사려니숲길 무장애길. 제주 강동삼 기자
노약자들은 입구 오른편에 있는 무장애숲길만 걸어도 사려니숲길의 매력에 금세 빠져 버린다. 지금처럼 그늘이 그리운 때 찾아가면 이보다 시원한 휴양림이 없다. 안개가 자욱한 날은 이름처럼 신성한 숲같은 상서로움에 빠져 든다.

편백숲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데 소나기가 쏟아진다. 길은 이내 진흙탕으로 변하고 있었다. 30여분 걸었을까. 행사요원이 사전예약했냐고 묻길래 못했다고 이실직고한다. 얼른 행사팀에 전화해서 예약해보란다. 지역언론 한라일보가 취재 협조 요청하는 내 전화에 난감해한다. 원칙은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일단 현장에서 취소하는 경우가 있으니 매표소에 가보란다. 하루에 150명만 사전예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난감하다. 다행히 이날은 비가 많이 와서 한두명은 더 현장에서 접수가 가능해 가까스로 탐방객들에 섞여 물찻오름으로 향했다.

물찻오름은 시작부터 난코스 오르막. 게다가 연일 내린 비 때문에 탐방로는 진흙탕이다. 왜 이곳이 2008년부터 자연휴식년제를 실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들의 발길에 비가 오면 토사가 흘러 내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안전데크도 설치가 안돼 있다.

#백록담 물이 마르고 사라오름 물이 마를때도 물찻오름 산정호수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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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나무에 가려 산정호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제주 강동삼 기자
울창한 나무에 가려 산정호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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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찻오름의 산정호수의 모습. (사)제주자연환경해설사협회 제공
물찻오름의 산정호수의 모습. (사)제주자연환경해설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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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찻오름 산정호수. (사)제주자연환경해설사협회 제공
물찻오름 산정호수. (사)제주자연환경해설사협회 제공
정상을 조금 앞두고 숲에 가려진 호수가 멀리 보였다. 안개까지 피어올라 보일 듯 말 듯 할 정도였지만, 마치 사슴이 살 것만 같은 산정호수다. 억수같은 비를 뚫고 올라왔는데 고작 보이는 것은 호수같은 얼굴에서도 코부분만 보일 정도였다. 아, 성이 안 찬다. 이 때문에 동행한 해설사가 말한다. 휴식년제를 끝내고 개방할 땐 나무의 가지들을 좀 쳐서 데크에서 감상할 수 있을 정도는 얼굴을 열어주는게 좋을 것 같다고 희망한다. 안 그러면 몰상식한 사람들은 또 저 탐방로 아닌 곳까지 몰래 들어가 호수를 감상하고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며 무언가를 파괴할 지도 모른다.

물찻오름은 물이 항상 차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표고는 717m이고 비고는 167m다. 물찻오름의 북서쪽 사면은 골이 패여 있으며, 언덕 사이에 대형 화산탄들이 널려 있다. 산 위의 분화구는 바깥 둘레 1000m 가량의 깔때기 형으로 못이 움푹 들어앉아 있다.

제주의 기생 화산 중 몇 안 되는 산정화구호(山頂火口湖)는 물이 연중 넘실거린다. 물잣오름, 믈찻오름, 검은오름, 물찻오름, ‘물잣오름’ 또는 ‘물찻오름’은 옛 기록과 같이 정상의 굼부리에 물이 있고 돌이 잣과 같이 쌓여 있다는 데서, 또는 산봉우리가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는 데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고 전해온다.

이곳 분화구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 백록담이나 사라오름의 물이 마를 때도 여긴 안 마른다. 그런데도 이곳이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지 않은 건 특이한 식물이 서식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상에 도달하니 세상이 백색이다. 안개에 휩싸여 평소에는 한라산 전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데 이날은 한치 앞 풍경조차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 초점을 잘못 맞춰 셔터를 잘못 누른 느낌이다. 하얗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다행히 내려오는 길은 올라온 길이 아닌 다른 샛길이 있었다. 내리막 진흙탕이 걱정됐는데 그나마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내려오자 마자 탐방로 안내소 앞에서 해설사에게 또 겸손하게 부탁해본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 물찻오름 호수를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며 혹시 찍어놓은 사진은 없는 지 물어봤다. 친절한 해설사씨는 그 자리에서 몇장의 사진을 내게 전송해준다. 무례하다고 느낄 법도 한데 너무나 흔쾌히 내게 산정호수를 전송해준다.

#산이 높고 험한 곳에는 나무가 안 자라듯… 물살 센 곳에 고기가 안 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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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찻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사)제주자연환경해설사협회 제공
물찻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사)제주자연환경해설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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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물찻오름은 장대비같은 장맛비로 인해 정상에서 볼 수 있는 하얀 안개뿐이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이날 물찻오름은 장대비같은 장맛비로 인해 정상에서 볼 수 있는 하얀 안개뿐이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채근담에는 이런 명언이 나온다. ‘산이 높고 험한 곳에는 나무가 없으되, 계곡이 감도는 곳에는 초목이 우거진다. 물살이 센 곳에는 고기가 없건마는 못물이 고이면 어별(고기와 자라)이 모여든다. 이렇게 너무 고상하고 성급한 마음을 군자는 깊이 경계할지니라.’

사람은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다행히 난 콧대가 높지 않은가 보다. 날 돕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공존의 이유를 깨닫는 날, 난 좀더 겸손해지기로 한다. 이 멋진 산정호수가 내게로 왔으니 난 수십번을 고맙다고 인사해도 부족하지 않을 그런 사진을 선물받았다. 사진은 화창한 5월에 찍었단다. 호수는 깊고 또 깊어 보였다. 엄지척 안할 수 없는 그런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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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사려니숲 에코힐링 체험행사에서 선보이는 사려니숲 사계절 풍경 사진전. 제주 강동삼 기자
제15회 사려니숲 에코힐링 체험행사에서 선보이는 사려니숲 사계절 풍경 사진전. 제주 강동삼 기자
물찻오름은 5일동안 750명이 다녀간다. 안타깝지만 5일 내내 장맛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물찻오름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없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가 말했다. “사람은 오로지 가슴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고. 정상의 풍경을 못봤지만, 내 가슴 속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한라산이 가슴에 박혔고, 상상 그 이상의 아름다운 호수와 조우했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런거다. 삶은. 다 가질 수 없지만, 다 가진 것 처럼 자신을 토닥여주는 것. 그래서 남루한 삶도 가끔은 풍요로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아내와 함께 오일시장에서 호떡 하나만 먹어도 행복해지는 그런 날 처럼….

이번 행사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되는 물찻오름은 향후 탐방로 정비 등의 과정을 거쳐 추후 일반인들에게 상시개방될 예정이다.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교래리 곶자왈손칼국수 한그릇 후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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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래 곶자왈손칼국수.
교래 곶자왈손칼국수.
교래리는 닭칼국수 마을로 유명하다. 웬만하면 이 일대 오름을 탐방하고 나서 배가 출출해지면 이곳 교래리마을에 들러 닭칼국수를 후르륵 들이키고 나면 속이 든든해진다. 너도 나도 원조 손칼국수집이라고 자랑하지만, 새롭게 확장이전한 곶자왈손칼국수집은 그 칼국수 양이 어마어마하다. 포만감의 대명사다. 셋이면 칼국수 2개에 녹두전하나 먹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다.

면발이 쫄깃쫄깃하고 닭육수에서 잡내가 안 나 예민한 코를 가진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해볼만 하다. 닭칼국수(1만원), 전복보말칼국수(1만 3000원), 녹두빈대떡(1만 7000원) 등이다.김치맛도 일품이다.

웬지 이곳에서 식사를 하면 시골 할머니집에서 행복한 밥상을 받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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