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운 논설위원이 짚어봤습니다 - ‘중동의 동네북’으로 전락한 이라크의 대리전 교훈
우선 이란인들이 완전히 장악한 시장 풍경. 청소부터 물건 납품에 손님까지 이란인에 의한 이란인의 시장이다. 마약 범죄가 크게 늘고 있는 이란·이라크 국경 마을에서 인터뷰 속 마약 범죄 수감자는 “마약은 이란에서 왔다”고 쉽게 털어놓는다. 나자프에 있는 시아파의 성지, 이맘 알리 모스크는 매년 수백만명의 이란인이 다녀가는 순례지가 됐다. 온통 이란 여성들이 가득한 화면에 등장한 한 여성 노인은 “그간 순례를 오지 못했는데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뒤로 가능해졌다. 여기는 우리나라 같다. 우리는 하나”라며 이라크에 대한 보통 이란인들의 인식을 드러낸다. 이라크 4000만여 인구 가운데 절반을 훌쩍 뛰어넘는 숫자가 ‘시아 무슬림’으로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종교적 동질감을 형성하고 있긴 하지만, 민족도 언어도 다르고 무엇보다 1980년부터 7년간 두 나라가 전쟁을 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미묘한 관계는 ISIS(이슬람국가 IS의 옛 명칭)의 등장부터 형성됐다. 이라크의 전 국가안보고문 모와팍 알 루바이는 인터뷰에서 “2014년 6월 시리아와의 국경에서 ISIS가 몰려오는 모습을 모니터로 보고 미국에 직접 요청했다. 공중 지원이라도 해 달라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거절했다. 결국 미국이 공중 폭격을 지원하는 데까지 3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이란은 24시간 만에 트럭에 사람과 물자, 무기를 싣고 와 바그다드를 지키는 데 도와주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이란은 시아파 종주국으로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ISIS의 준동을 지켜볼 수는 없던 터였다. 이때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무기를 들 수 있는 (이란)시민들은 (이라크를 지키는) 민병대에 자발적으로 합류해야 한다”고 공개 연설을 한다.
이렇게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PMF·인민동원군)가 조직되고, 민병대는 이라크 정부의 승인 아래 영향력을 계속 확대해 오고 있다. 알 루바이는 “이란을 의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뒤 본격화된 이라크를 향한 이란의 집념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서쪽 이라크와 1440㎞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란으로서는 이라크를 통해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연결되는 육상 통로를 얻는다. 이 루트를 확보하지 않고는 시리아 아사드 정권, 헤즈볼라 중심의 레바논 내 시아파 세력 등을 아우르는 이른바 ‘시아파 초승달 지대’를 구축할 수 없다.
PMF는 ISIS를 퇴치하면서 이란 국민에게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기에 이르렀다. ISIS를 격퇴한 이후는 문화와 경제적 유대감 형성을 통해 이라크에 대한 레버리지를 높이려 노력해 왔고, 어느 순간부터는 PMF 대변인이 “선거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공개 촉구할 만큼 PMF는 공공연하게 정치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해 왔다. 이라크 의회는 서서히 이란의 영향력 아래로 흡수돼 가고, 친이란 후보들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기에 이르렀다. 한 후보는 “이란, 러시아와 함께 테러 퇴치를 향한 길을 열어 나가겠다”고 공언한다. 이야드 알라위 전 이라크 총리는 “선거에서 이란의 역할은 지대하다. 이라크를 컨트롤하려 한다. 큰 대목에서부터 미세 부분까지 개입하고 있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이라크 의회가 지난 5일 긴급회의를 열어 미군 철수 결의안을 가결한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결의안은 “이라크 정부는 모든 외국 군대의 이라크 영토 내 주둔을 끝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그 군대가 우리의 영토와 영공, 영해를 어떤 이유에서든 사용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수니파와 쿠르드 계열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시아파 출신 의원에서 압도적인 찬성표가 나왔다고 로이터통신은 보도했다.
지난 3일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한 것은 오히려 이라크를 깊은 근심으로 이끌고 있다. 호세인 살라미 이란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이 지난 7일(현지시간)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장례식에서 “우리는 적(미국)에게 보복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아끼는 곳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우리의 복수는 강력하고 단호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수행될 것이며 적을 후회하게 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누구보다 가슴이 서늘해진 건 이라크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국방장관을 지낸 이란 최고지도자의 군사 수석보좌관이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란의) 대응은 틀림없이 군사적일 것이며, (미국의) 군사시설을 대상으로 할 것”이라고 했을 때 그 1차 대상은 이라크에 있는 미군시설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이라크는 ‘대리전’의 역사가 깊다. 이야드 알라위는 그 역사를 이렇게 읊었다. “이란·터키, 뒤이어 이란·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국제사회가 조금씩 빨려들어 오고 있다. 러시아가 시리아를 전진기지로 삼고, 미국이, 유럽이 빨려들어 오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는 ‘이라크가 미국·이란 대리전의 플랫폼이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결국 모든 건 이라크가 감당하게 된다. 악몽 같은 일”이라고 했다.
이 인터뷰들과 취재는 2018~2019년쯤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HBO 바이스가 이 취재물을 바로 내지 않은 것은 정치적 성향이 작용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연초에 결국 이 비디오 클립을 올리게 된 것은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예언적’인 요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야드 알라위는 당시 “지역의 긴장도가 끓는점에 도달해 있다”고 진단했다.
수십년 대리전으로 이라크는 이웃 나라 시리아처럼 사실상 국가 와해 상태를 맞고 있다. 먼저는 IS에 의해서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각각 최소 수백만명이 넘는 난민이 국내외를 표류하고 있고, IS는 이 두 나라에서 ‘무기명 여권’과 여권 인쇄기까지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국들로부터는 그림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 미군이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 내 시설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이란은 민병대를 동원하며 이라크 국민들을 부추겨 이라크 내 해외 공관을 습격하게 했다. 이란은 미국에 보복하겠다고 이라크 영토 안으로 탄도미사일을 쏘아 댔다. 또 다른 이웃 터키는 쿠르드족 무장조직 쿠르드노동자당(PKK)의 근거지를 소탕한다면서 이라크 북부 산간 지역으로 전투기를 보내 폭격하면서도 이라크 정부의 승인이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이번에 이라크가 성명을 내고 “이라크는 주권을 위반하는 행위를 반대하고 우리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공격을 규탄한다”고 항의해도 국제사회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바빌론 제국의 영광은 오늘날 이렇게 초라해졌다. 대리전이 주는 교훈이다.
jj@seoul.co.kr
2020-01-1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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