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당대 개혁안 내놓고 실사구시 추구한 이익… 영원한 성리학 스승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당대 개혁안 내놓고 실사구시 추구한 이익… 영원한 성리학 스승

입력 2018-12-10 17:36
수정 2018-12-1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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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익 ‘성호전집’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을 말할 때 곧바로 떠오르는 단어는 ‘성호사설’과 ‘실학’이다. ‘성호사설’은 이수광의 ‘지봉유설’,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함께 실학의 대표적 저술이다. 성호는 실학을 한층 체계화해 다산 정약용에게 전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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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필사본.
성호사설 필사본.
성호는 아버지 이하진이 당쟁에 휘말려 평안도 운산으로 귀양 갔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부친이 귀양지에서 사망하자 모친과 함께 경기도 안산으로 내려와 10세 무렵부터 둘째 형 이잠을 비롯한 집안의 형님들에게서 글을 배웠다.

성호 생애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은 그가 26세 때 일어났다. 이잠이 당시 세자이던 경종을 해치려는 세력을 처단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심한 고문을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아버지에 이어 형까지 이런 참화를 겪게 되자 성호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매진하게 된다.



#퇴계의 성리학을 계승하다

도산서당은 선생이 손수 지은 것이라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이도 후세 사람들이 감히 옮기거나 바꾸어 놓지 않았다. 때문에 낮은 담장과 그윽한 사립문, 작은 물길과 네모난 연못이 소박한 예전의 모습 그대로여서 마치 선생을 뵌 듯 우러러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 처음에는 마치 선생의 음성이 들리기라도 하듯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가 나중에는 손으로 어루만지며 불현듯 경모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백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이 선생의 유적을 보고서 이렇게 감흥이 일어나거늘, 당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야 오죽하겠는가.

-도산서원 참배기

이잠이 죽은 지 3년 뒤 29세의 성호는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영남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죽령을 넘어 퇴계의 자취가 남아 있는 풍기의 소수서원과 봉화의 청량산을 둘러본 다음 도산서원을 방문했다. 서원에 들어서서 원생들의 숙소인 박약재와 홍의재, 강의실인 전교당을 지나 퇴계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에 올라 참배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퇴계가 생전에 강학을 하던 도산서당을 찾았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직접 설계해 지은 것으로, 여타 서원 건물과 달리 소박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왼편 담장 아래에는 정우당이라는 네모진 작은 연못이, 담장 너머로는 퇴계가 손수 기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방 안에는 사용하던 유품이 많이 보존돼 있었다. 성호는 도산서당을 둘러보며 퇴계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학문에 대한 열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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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산시 상록구에 소재한 성호의 묘소.
경기 안산시 상록구에 소재한 성호의 묘소.
성호는 집안 형님들을 제외하면 특별히 배운 스승이 없다. 하지만 그의 학문적 연원은 허목을 통해 퇴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목은 거창 군수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경상도에 내려갔다가 인근 성주에 사는 퇴계의 문인 정구를 찾아가 퇴계의 학문을 전수했다. 허목은 성호의 조부 이지안과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벗이었다. 부친 이하진은 허목이 남인의 영수로서 서인과 대립할 당시 가장 가까이서 보좌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퇴계의 성리학을 계승한 허목의 학문이 자연스레 성호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성호는 자신과 퇴계의 공통점을 자주 강조했다. 퇴계가 태어난 1501년과 성호가 태어난 1681년은 같은 신유년 닭띠 해이고, 두 살 되던 해 6월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심지어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도 똑같이 겪었다는 것이다. 남들은 이를 우연이라 여길지 모르겠으나 성호는 이마저도 자신이 퇴계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으로 연결했다. 그러한 까닭에 도산서원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퇴계의 문집이나 문인록의 편찬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와 함께 퇴계의 중요한 말씀을 모은 ‘이자수어’(李子粹語)와 퇴계의 예설을 정리한 ‘이선생예설유편’(李先生禮說類編)을 직접 편집하고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지어 사단칠정에 대한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의 견해를 비판하고 퇴계의 주리론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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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가 ‘맹자’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맹자질서(孟子疾書). 이 책을 짓는 도중에 아들을 낳게 되자 그 이름을 맹자의 ‘맹’자를 따서 ‘맹휴’(孟休)라 지었다.  성호기념관 소장
성호가 ‘맹자’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맹자질서(孟子疾書). 이 책을 짓는 도중에 아들을 낳게 되자 그 이름을 맹자의 ‘맹’자를 따서 ‘맹휴’(孟休)라 지었다.
성호기념관 소장
#당대의 현안을 논하다

‘성호사설’은 성호옹(星湖翁)이 생각나는 대로 지은 글이다. 옹이 이 ‘사설’을 지은 뜻은 무엇인가? 아무런 뜻이 없다. 뜻이 없는데, 어찌 이것을 지었는가? 옹은 한가한 사람이다. 독서하는 여가에 남들처럼 전기(傳記)에서 얻기도 하고, 제자백가나 문집에서 얻기도 하고, 시가(詩家)에서 얻기도 하고, 전해들은 이야기에서 얻기도 하고, 우스개에서 얻기도 하였는데, 웃고 즐길 만한 것 중에서 보존하여 볼 만한 것을 붓 가는 대로 어지럽게 기록하니, 어느덧 글이 많이 쌓이게 되었다.

-‘성호사설’ 서문

‘성호사설’은 성호의 겸손한 표현과 달리 평소에 학문을 하면서 생각이 떠오르거나 의심나는 것을 자신의 의견과 함께 적어 둔 글,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정리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의 5가지 분야로 나눠 모두 3007편을 수록했다.

그 속에는 당시의 현안이던 토지, 군사, 교육 등 각종 제도에 대한 개혁안을 비롯해 서양 학문, 유교 경전, 시문학 등에 대한 해박한 식견이 들어 있다. 이는 성호의 열렬한 학구열은 물론이요, 편지를 통한 제자들과의 진지한 토론, 그리고 부친 이하진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구입해 온 수많은 서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호전집’은 이 ‘성호사설’과 내용상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호는 역사나 예법 등 당시의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제자들이 편지로 질문하면 이에 대해 답장을 먼저 보내고, 그것을 다시 정리해 독립된 단편으로 저술했다. 그런 다음 편지 내용은 문집에 수록하고 단편은 ‘성호사설’에 수록했다. 따라서 성호의 학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책을 함께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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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년 9월 6일에 성호가 이사문에게 보낸 ‘성호편지’.
1743년 9월 6일에 성호가 이사문에게 보낸 ‘성호편지’.
#저술로 영원한 스승이 되다

도를 품고서 혜택을 베풀지 못한 것은

한 시대의 불행이지만

저서를 지어 혜택을 베푼 것은

백 세대의 다행이로다

하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한 시대는 짧지만 백 세대는 길고 길도다

정조대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이 지은 성호의 묘갈명이다. 성호는 ‘성호전집’과 ‘성호사설’, ‘사칠신편’ 이외에도 사서삼경과 성리학 기본서적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11종의 ‘질서’(疾書)를 편찬하고, 예론을 정리한 ‘상위록’(喪威錄), 국가적 당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한 ‘곽우록’(藿憂錄), 민간에 떠도는 속담들을 모은 ‘백언해’(百諺解)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들 저술에 담긴 성호의 학문은 후대 학자들에게 계승돼 구한말까지 큰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그의 학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성호는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한 삶을 살았기에 자신의 포부를 당대에는 펼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저술을 남김으로써 후세의 영원한 스승이 됐다. 이는 성호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라 채제공은 믿었다.

최채기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2018-12-1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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