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에 가려진 사람들] <2부> 형벌 불평등 사회
같은 벌금형, 다른 강제노역의 무게지난해 연말 벌금 250만원을 선고받은 박봉준(35·가명)씨는 돈을 내지 못해 25일간 노역장에 유치됐다. 일용직 근로자인 박씨는 그 기간 동안 인력사무소에 출근하지 못해 출소 이후 일자리도 끊긴 상황이다. 박씨는 “사회봉사 대체나 분납 등이 가능했다면 그대로 노역장에 끌려가진 않았을 것”이라면서 “인력사무소는 일자리를 구하는 순서로 일을 주기 때문에 노역 기간 후 다시 일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6월 고교 동창의 범죄에 연루돼 처음으로 전과를 달았다. 박씨와 고교 동창은 지하철 역삼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중 앞에 서 있던 여성의 치마 밑을 촬영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박씨는 “친구가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둔 내 휴대전화를 가져가 무단으로 촬영했다”고 항변했다. 경찰은 동창뿐 아니라 박씨도 성폭력특례법 위반 혐의로 약식기소했다.
몰카를 촬영했던 동창은 징역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고 박씨는 벌금형만 선고됐다. 법원은 박씨에 대해 직접 촬영하지 않았으며 동종 전과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같이 선고했다. 박씨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 친구가 동종 전과가 여러 차례 있다는 사실을 수사 과정에서 처음 알았다”며 “내가 휴대전화를 준 상황이 아닌 데도 공범이 돼 처벌을 받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벌금 미납으로 지명수배자가 된 박씨는 PC방과 찜질방을 전전하다 결국 수도권의 한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의 노역장 생활은 단순했다. 박씨는 벌금 미납으로 유치된 5명과 함께 벌금방으로 불리는 33㎡(10평) 크기의 수용실에서 아침 6시에 기상해 오후 9시 취침 전까지 구금됐다. 벌금방 유치자 대부분 수백만원의 벌금을 내지 못해 하루 10만원씩 차감하며 시간을 보내는 처지였다.
똑같은 벌금형 노역자이지만 박씨와 전혀 다른 생활을 한 노역자도 있었다. 대부분 수억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거물들이었다. 이들은 하루 최대 500만원의 벌금을 차감하는 일명 ‘황제 노역’ 유치자들이었다. 사업을 하다 6억여원의 벌금을 선고받고 노역장에 유치된 50대 이대흥(가명)씨는 수용실의 왕처럼 생활했다. 그는 한도인 300만원으로 꽉 채운 영치금으로 자신의 속옷 빨래도 다른 수용자에게 시켰고, 단체 청소 활동도 열외됐다. 이씨는 하루 최대 사용 한도가 2만원인 영치금을 빵이나 과자, 우유 등을 사 동료 수용자들에게 나줘주며 환심을 샀다. 비용 제한이 없는 침구와 약품의 경우 이씨는 별도의 개인 물품으로 썼다. 그야말로 돈의 위세였다. 이씨의 하루 차감 벌금 액수는 박씨의 열배인 100만원으로 책정됐다. 교도소 노역장에서도 빈부 격차의 현실은 이어졌다. 박씨는 “노역장 안에서 담당 교도관의 업무를 보조하는 봉사원도 이씨 개인의 봉사원처럼 행동했다”면서 “이씨의 존재는 ‘가만히 있어도 주변 수용자들이 떠받들고 봉사를 해 주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2014년 조세포탈과 횡령 등 혐의로 254억원 벌금형을 받고 하루 5억원씩 차감받았던 ‘황제 노역’이 논란이 된 후 형법 70조에는 1억원 이상인 경우 300일 이상, 5억원 이상인 경우에는 500일 이상, 50억원 이상인 경우에는 1000일 이상의 유치 기간을 규정하는 조항이 추가됐다. 허 전 회장 같은 황제 노역이 재발되지 않도록 한 조치이지만 노역장 내 계급은 여전히 유효하다. 박씨는 “똑같은 공간에서 한 사람은 대접받으면서 하루 100만원씩, 우리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거물 노역자의 심부름이나 빨래를 해 주며 10만원씩 차감받는다”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누구도 감히 따지고 묻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강제 노역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운영 중인 사회봉사 제도는 여전히 실효성이 낮다. 지난해 집행된 전체 벌금형 65만 7428건 중 사회봉사로 대체된 건 4982건(0.8%)에 불과하다. 김준우 송파솔루션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2017년 4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회보장위원회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가 교통법 위반으로 벌금 70만원을 받았다. 지체장애인(1급)인 김 소장은 노역을 대체하기 위해 사회봉사를 신청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김 소장은 지난해 12월 스스로 장애인지원센터에 만든 상담업무로 사회봉사를 하며 벌금을 때우는 중이다. 우여곡절 끝에 사회봉사를 하지만 그에게 교통비와 식비 등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김 소장은 “장애인택시로 사회봉사 지역까지 이동하는데 차비와 식비마저 없는 경우 사회봉사도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노역형을 대체한 사회봉사에 수반되는 교통비와 식비는 자비 부담이다.
이태권 기자 rights@seoul.co.kr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2020-02-26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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