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서울신문 탐사기획-法에 가려진 사람들] <1부> 가난은 어떻게 형벌이 되는가
‘유죄 추정주의’ 작동하는 약식명령약식명령은 대부분 소액 벌금형인 경미한 사건에 한해 법원이 정식재판을 열지 않고 서류만으로 형벌을 정하는 처분이다. 공개재판에 대한 피고인의 심리적·경제적 부담을 덜어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또 가벼운 범죄에 대한 공판절차를 생략해 검사와 판사가 중대한 범죄 심리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다 보니 피고인이 약식명령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면 유죄 추정주의가 작동한다. 통상 경찰 조사 내용이 검찰의 약식기소를 거쳐 그대로 법원에서 확정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판사는 검찰이 넘긴 기록만으로 벌금형 확정과 정식재판 회부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판사가 무죄로 판단하더라도 약식기소를 기각하고 무죄판결을 내릴 수 없어 정식재판에 회부해야 한다. 범죄자가 되는 건 신속하지만, 무죄를 받는 건 정식재판이라는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하는 셈이다.
간단한 경찰 조사로 범죄 소명이 마무리돼 피고인이 방어권을 행사할 기회는 많지 않다. 약식명령을 선고받기까지 수사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로잡을 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최석호(59·가명)씨는 2018년 폭행으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다가 정식재판을 청구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최씨는 “아파트 선거관리위원회 업무로 시비가 붙은 상대가 내 멱살을 잡고 얼굴을 때렸고 당시 다수가 목격했다”며 “하지만 경찰은 증인 조사도 하지 않고 나를 쌍방 폭행으로 검찰에 넘겼다”고 밝혔다.
장발장으로 불리는 생계형 범죄자들의 정상참작 사유도 반영되기 어렵다. 형법 제51조는 형을 정함에 있어서 범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등을 참작하도록 규정하지만 경찰 조사에서 진술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점유이탈물횡령죄로 벌금 250만원을 선고받았던 오주연(45·가명)씨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 자백 외에 기초생활수급자 등의 경제적 상황을 진술할 기회는 없었다”고 말했다.
벌금형 의 양형 기준이 없는 건 약식기소 주체인 검사의 재량권이 그만큼 넓다는 의미로 통한다. 현재 벌금형 양형 기준은 선거 범죄에만 존재한다. 조영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는 “검사가 청구한 벌금형이 과다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양형 기준이 아예 없어 제각각”이라며 “약식명령 사건들은 큰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도 자체가 방치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약식명령 당사자가 정식재판을 청구할 수 있지만 대다수는 경제적·시간적 부담으로 청구 권리를 포기한다. 수원지방법원 국선전담 정혜진 변호사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곤궁함에 처한 분들은 재판 비용 때문에 억울해도 벌금을 갚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무죄를 다투거나 벌금을 감액받기 위한 재판 청구라도 불이익의 위험이 크다. 2018년부터 형사소송법상 ‘불이익 변경 금지’ 원칙이 폐지되면서 약식명령보다 중한 형이 선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빈곤·취약계층에 대한 ‘벌금형 집행유예’ 제도 역시 유명무실하다. 집행유예 제도는 500만원 미만 벌금형에 한해 돈이 없어 노역에 유치되는 빈곤층을 감안한 제도이지만 약식명령 벌금형은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사례가 전무하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약식기소 자체가 경미한 사건이라는 검찰의 판단을 전제로 하는 만큼 집행유예까지 선택지를 늘려 놓으면 신속한 사건 처리라는 약식명령의 취지에 맞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이태권 기자 rights@seoul.co.kr
2020-02-19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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