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란/오정희 지음/시공사/344쪽/1만 6000원
오정희 콩트 42편 한 권에 묶어저마다 중년 향해 가는 주인공들
빛나는 시절을 잃었다는 상실감
일상에서 ‘섬뜩한 자각증상’ 느껴
현재를 사는 우리의 이야기 담아
소설가 오정희가 삶과 사유의 족적이 기록된 짧은 소설 42편을 묶어 ‘활란’을 냈다. 작가는 “과거 보통 여자들의 삶을 그렸지만, 현재 독자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일 수도, 공통분모가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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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화자의 나이(30~70대)는 물론 성별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대다수 작품, 심지어 남성 화자를 내세운 작품마저도 40대 전후 여성의 삶에 집중한다. 오정희 단편소설에 등장했던 불륜, 낙태, 가출 등 일탈하는 여성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잡지나 신문에 실었던 콩트의 관행에 맞춰 유머나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들(‘건망증’, ‘비 오는 날의 펜팔’, ‘어떤 자원봉사’ 등)도 눈에 띈다.
‘활란’의 주인공들은 일상의 균열을 포착하고 천착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무심결에 눈에 들어온 정경이나 당연하고 친숙한 나날 중의 어느 순간 느닷없이 맞닥뜨린 생의 낯선 얼굴, 감히 심연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세상과 삶의 미세한 균열들이 이러한 글들을 짓게 한 빌미가 됐다”고 소개한다.
‘나는 누구일까’의 주인공은 현재의 삶에 감사하며 자족하고 살면서도, 문득문득 아이들과 남편이 자신을 종처럼 부린다는 생각에 굴욕감을 느낀다. “커다랗고 뻣뻣한 운동화 짝을 한없이 문지르며 빨 때, 방마다 널린 이부자리를 갤 때, 특히나 텔레비전을 보며 희희낙락하는 가족들 앞에서 엉덩이와 등허리를 보이며 엎드려 걸레질을 할 때면 설명하기 힘든 굴욕감을 느끼곤 했다.”(31~32쪽)
‘꽃핀 날’의 나는 목련의 꽃망울이 밤새 함성처럼 터진 것을 보고 전율하지만, 밥을 태운 것을 타박하는 식구들 탓에 비루함을 느낀다. “솥 안에 새까맣게 눌어붙은 밥을 숟가락으로 긁어내다가 난데없이 후룩 눈물이 떨어졌다. 슬프다거나 참담하다거나 따위 자극적인 감정의 작용이 없는데도 그랬다. 눈물이 어린 눈에 환시처럼, 착시현상처럼 피어오르던 목련이 떠올랐다. (중략)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그 운명적인 시간이 내 존재의 한순간과 만나 섬광처럼 부딪치고 사라졌다. 인생의 꿈이나 그리움이라는 것도 그러한 것인가.”(162쪽)
‘사십 세’의 주인공 ‘활란’은 겨우 쉰 살 된 이웃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밥 먹고 잠자고 부지런히 재산을 늘리고 자잘한 근심과 기쁨으로 때로는 막연한 권태와 회의로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은 나날이 어느 순간, 가던 길이 뚝 끊기듯 중단되는 것”(174쪽)에 배반감을 느낀다. “흐르는 물살처럼 떠밀려 온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의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새로운 생을 살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통쾌한 일일까”(179쪽) 하고 탈주를 꿈꾸지만, 무심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다.
‘활란’의 이야기들은 독자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삶의 표면을 보여 주고 또 이면을 들춰 준다. ‘내가 정말 살고 싶었던 것이 이러한 생이었던가’ 의심하는 존재들에게 작가는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이나 적막감, 외로움이 또한 힘이 되지 않았던가”라고 반문한다. 물론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40대의 이야기가 아닌, 이미 지나간 이삼십 년 전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보내고 현재를 사는 모두의 이야기, 혹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힐 여지를 남긴다.
2022-08-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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