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 주택지/이경아 지음/집/392쪽/2만 3000원
‘경성의 주택지’의 저자는 주택과 주택지에 대한 열망의 기원을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주택은 “짓고자 하는 사람과 지어주는 사람만이 존재하는 일종의 주문생산 방식”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경성 인구가 폭증하면서 대규모 주택을 위한 주택지 개발이 본격화했다. 20만명 안팎이었던 인구는 1920년대 25만명, 1930년대 40만명으로 불어났고 1940년대에는 100만명에 육박했다.
1920년대부터 개발자 또는 개발회사가 대규모 필지를 사들여 불특정 다수에게 분양하고, 주택지에 별도의 브랜드를 붙여 신문이나 잡지에 광고를 하거나 모델하우스를 공개한 방식 등은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부동산 투기 열풍도 거셌다. 주택지로 개발된 땅은 논, 밭, 산, 공동묘지나 빈민 주거지가 대부분이었는데 개발로 인해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원주민들과 격렬한 대립과 충돌이 빚어진 상황 역시 낯설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 있는 주택과 주택지의 기준은 비슷했다. 주변에 녹지가 있고, 교육·의료·문화시설과 같은 생활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버스나 전차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가 노른자로 꼽혔다. 이런 이상적인 잣대에 부합하는 3대 주택지가 있었다. 1925년부터 삼판통(현재 후암동 일대)에 개발된 학강 주택지, 1927년 장충동 일대에 개발된 소화원 주택지, 1928~1934년 3차례에 걸쳐 죽첨정(현 충정로 일대)에 개발된 금화장 주택지이다. 국책회사인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에서 개발한 장충단 주택지는 최고급 주택의 각축장이었고, 해방 직후 재벌들의 주택지로 유명했다. 전원주택지였던 신당동, 한강 너머의 이상향이었던 흑석동, 최신 주거문화의 전시장으로 꼽혔던 충정로 등 당대의 주택지 개발 역사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2019-12-06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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