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 두려워한 제국주의가 낳은 모험소설

새 시대 두려워한 제국주의가 낳은 모험소설

손원천 기자
손원천 기자
입력 2019-10-24 17:22
수정 2019-10-25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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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준 것과 숨긴 것/이석구 지음/소명출판/478쪽/3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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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드라큘라’(1993)에 나오는 여성 흡혈귀들. 원작인 브람 스토커의 동명 소설은 19세기 말 백인과 남성 우월주의 등의 가치관을 심으면서 여성을 ‘관능적이지만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로 비춘다. 서울신문 DB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드라큘라’(1993)에 나오는 여성 흡혈귀들. 원작인 브람 스토커의 동명 소설은 19세기 말 백인과 남성 우월주의 등의 가치관을 심으면서 여성을 ‘관능적이지만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로 비춘다. 서울신문 DB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1897)를 모르는 이는 없을 듯하다. 책, 영화 등으로 한 번쯤 접해봤을 고전이다. 한데 이 소설에 19세기 말 영국에 횡행했던 백인과 남성 우월주의, 순혈주의, 제국주의 등의 가치관이 투영됐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신간 ‘들려준 것과 숨긴 것’은 이처럼 세기말을 풍미했던 모험소설들을 해부해 책 속에 감춰진 온갖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낱낱이 끄집어내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 등 익히 알려진 책 외에도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쉬’(그녀) 등 다양한 책들이 도마에 오른다.

되짚어 보면 사실 드라큘라는 도입부부터 서양의 우월의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국의 전도유망한 젊은 변호사 조나단 하커가 여행을 시작하며 “서양을 벗어나 동양으로 진입하는 것 같다”고 중얼거린 대목이 그 예다. 드라큘라 백작의 성이 있는 곳은 트란실바니아 동북쪽의 후미진 지역이다. 이 지역에 정착한 민족은 ‘세클레르족’이다. 아시아에 거주했던 기마민족 훈족의 후예다. 훈족은 한때 서양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야만족’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배경부터 당대의 유럽인을 위협했던 ‘퇴행성’이 유래한 곳으로 설정된 셈이다. 흉물스런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드라큘라 백작은 더 말할 게 없다. 동양의 전제주의, 비합리적 미신, 야만성 등이 죄다 그에게서 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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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출간된 ‘산호섬’의 삽화. 주인공 잭이 원주민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렸다. 백인 우월성과 유럽의 복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소명출판 제공
1885년 출간된 ‘산호섬’의 삽화. 주인공 잭이 원주민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렸다. 백인 우월성과 유럽의 복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소명출판 제공
●신여성에 대한 불안감 드라큘라에 반영

왜 이런 소설이 당대에 유행했을까. 저자는 영국 내부의 제국주의적 요소 외에도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부상하던 ‘신여성’에 대한 강력한 경계 심리가 또 하나의 축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19세기 말 영국에는 가부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들은 여성의 성에 대해 가졌던 온갖 의심과 불안을 경제 영역에서 남성의 경쟁자로 떠올랐고, 정치적 권리까지 요구하는 신여성에게 투사했다. 신여성은 “공격적”이고 “악의에 차” 있으며 “성적으로 무절제”한 데다 “도덕적으로도 타락”했다며 공격했다.

신여성의 문란한 성에 대한 불안은 ‘드라큘라’의 여성 흡혈귀들에 대한 묘사에도 반영된다. 조나단 하커가 드라큘라의 성에서 만나는 세 명의 여성 흡혈귀들은 각기 피부색은 다르지만 관능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는 감미로웠고 자태도 관능미가 넘쳤지만 “날카로운 흰 이빨”은 결코 야수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남성’ 하커가 ‘여성’의 유혹에 굴복하는 대가로 문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야만적 수준으로 퇴행한다는 메시지가 이 대목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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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년 4월 25일에 출간된 ‘로빈슨 크루소’ 초판본 표지. 소명출판 제공
1715년 4월 25일에 출간된 ‘로빈슨 크루소’ 초판본 표지. 소명출판 제공
●19세기 ‘제국주의 로맨스’ 낱낱이 해부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이제껏 고전으로 여겨졌던 영국의 모험소설들을 낱낱이 해부한다. 예컨대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로빈슨 크루소’(1715)의 경우, 전체 얼개를 영국 제국의 식민지 경영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했던 ‘제국주의 로맨스’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 그러니까 유럽 중심적 시각, 백인 남성성을 입증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던 해외 모험, 여성을 배제하거나 주변화시키면서 드러내는 특권화된 남성성 등이 원형적 형태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보물섬’(1883)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보물은 하층민이 상류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 노릇을 한다. 하지만 보물들의 출처를 거슬러 오르면, 보물은 모두 이전 세대의 해적질로부터 온 것이란 걸 발견하게 된다. 결국 해적은 제국주의의 다른 얼굴이란 얘기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2019-10-25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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