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5월 경찰의 외설서적 단속에 걸려 압수된 소설 ‘식모’ 표지. 당시 식모를 보던 인식의 단면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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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아 밀어붙이더니/ 슬금슬금 더듬어 온다/ 서자니 다리 아프고/ 옆에 앉자니 징그러워/ 엉거주춤 걸터앉았더니/ 엉덩이 툭툭 치며 엉큼하게 쳐다보다/…/ 애 어른 몰라보고 되는 대로 주무르는/ 밝혀대는 헷손질이니 기가 막히다/ 입술은 깨물고 가슴은 분노를 참다가/…/ 자학으로 가슴을 눌러 통곡해 쓰러진다”
직업소개소를 찾은 이른바 ‘조선어멈’들. 매일신보 1938년 5월 3일자 지면에 실린 사진이다. ‘조선어멈’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민족적 멸시를 담아 부르던 표현이었지만 조선 사람도 함께 쓸만큼 ‘식모’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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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수색 당하는 버스안내양. 영화 ‘도시로 간 처녀’(1981)의 한 장면이다. 1960~70년대엔 이른바 ‘삥땅’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안내양을 숙직실 등으로 불러 알몸으로 ‘검신’을 받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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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버스에 매달린 버스안내양의 아슬아슬한 모습. 문을 닫지 못하고 출발하는 이른바 ‘개문발차’ 탓에 부상을 당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안내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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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안내양의 역사는 뜻밖에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오른다. 1933년 6월 대구의 부영버스는 여성 차장을 뽑는다는 공고를 낸다. 남성 차장이 대세였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을 텐데,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산술과 구술 등 평소 치렀던 시험과목 외에 또 하나의 선발 기준이다. 바로 ‘외모´였다. 모집 공고문에조차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얼굴이 아름다운 이’라고 명시했고 이력서에 상반신 사진도 첨부해야 했다.
남성 차장을 급속도로 대체한 버스안내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꽤 이중적이었다. 동정심을 보내는 이도 있었지만, 요금 시비와 제시간 발차 요구 등 불만을 쏟아내는 이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차순이’는 철저히 을이었다. 손님 대 종업원, 어른 대 어린 것, 남자 대 여자, 배운 것 대 못 배운 것의 대립 구조에서 버스안내양은 늘 후자였다.
퇴근하는 여공들을 촬영한 옛 사진. 당시 세간의 인식은 이들을 ‘공순이’라 부르며 얕잡아 부르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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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 말미에서 “화려한 경제 개발의 그늘에서 그들(삼순이)은 이름과 달리 ‘순’하게 살 수 없었다”며 “지금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현대판 삼순이’ 동남아 이주 여성들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2019-09-06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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