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소설로 톺아보는 영화 ‘혹성탈출’ 속 장면
반세기 전 출간된 짤막한 소설 한 권에서 무려 10편의 영화가 탄생했다. 프랑스 SF 작가 피에르 불(1912~1994)의 1963년작 ‘혹성탈출’ 이야기다. 인간과 유인원의 위계를 전복하는 상상력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지난 8일 개봉된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도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 서 있다. 영화 속 장면들의 의미를 원작 소설과 앞선 영화(오리지널 5편·리부트 3편)와 비교하며 짚어 봤다.#1 ‘인간적인 것’의 경계
1968년 영화 ‘혹성탈출’에서 유인원들이 인간을 사냥하고 있다.
20세기스튜디오·월트디즈니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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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주인공 윌리스의 시선에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항성 간 우주여행의 목적지였던 행성 ‘소로르’는 지구와 상당히 비슷하다. 약간의 친근함마저 느끼려던 차, 별안간 총성이 울리고 정글은 아수라장이 된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윌리스가 망연자실한 것은 ‘지구인처럼’ 차려입은 고릴라를 봐서다. 확고했던 ‘인간적인 것’의 경계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갈색 저고리는 파리 최고의 양복점에서 맞춘 것 같았고, 대형 격자무늬 셔츠는 우리 운동선수들이 입는 옷과 흡사했다.”(소설 56쪽)
#2 ‘눈부신 신성’과 여성의 굴레
영화 속 노바는 오리지널(사진)에서는 젊고 매혹적인 여성이, 리부트 시리즈에선 어린 소녀가 연기했다.
20세기스튜디오·월트디즈니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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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눈부신 신성’과 여성의 굴레
영화 속 노바는 오리지널에서는 젊고 매혹적인 여성이, 리부트 시리즈(사진)에선 어린 소녀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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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혹적인 여성 노바는 ‘혹성탈출’ 시리즈 전체에서 논쟁의 소지가 있는 인물이다. 지성이 없는 노바는 동물에 가까운 존재다. 오로지 육체적인 매력만으로 윌리스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노바를 향한 시선은 비판적으로 검토될 여지가 있다.
리부트 시리즈는 노바를 다른 방식으로 계승한다. ‘종의 전쟁’에서 지능을 잃어 가지만 유인원 안에서 길러지는 인간 소녀(아미아 밀러 분)에게 이 이름이 주어진다. 성적 대상화 맥락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주체가 아닌 객체에게 부여되는 이름이라는 점에서 수동성을 상징한다. ‘새로운 시대’에서 잠시 노바의 이름을 받았던 소녀(프레이아 앨런 분)는 “나의 이름은 메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타자에 의한 명명을 거부하는 메이 이후 ‘혹성탈출’ 속 여성들은 노바라는 이름에 씌워진 대상화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3 불화하는 인간과 유인원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 주인공 노아가 독수리와 교감하고 있다.
20세기스튜디오·월트디즈니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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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는 제목처럼 새 시리즈의 서막이다. 그러나 시저의 당부와는 다르게 앞으로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불화는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걸 복구하는 인간이 빠를까, 인간을 모방하는 유인원이 빠를까. 영화의 결말이 나려면 아직 멀었으니 소설로 가보자. 유인원들의 혹성인 소로르를 탈출해 우주선을 타고 700년 후의 지구로 돌아온 윌리스. 그는 공항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한다.
“운전사가 트럭에서 내렸다. … 그 모습을 본 노바는 비명을 지르더니 내게서 아들을 빼앗고 황급히 착륙선 안으로 피신했다. 나는 제자리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떤 손짓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관리는 고릴라가 아닌가.”(239~240쪽)
2024-05-1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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