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의 지독한 사랑·복수… 그 처절함에 대하여

한 여자의 지독한 사랑·복수… 그 처절함에 대하여

조희선 기자
조희선 기자
입력 2017-03-12 17:02
수정 2017-03-13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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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의 정수… 이혜영 주연의 국립극단 연극 ‘메디아’

한 여인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정적을 깬다. 검은색의 긴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암흑 같은 분노를 휘감은 듯 보인다. 믿었던 사랑에 배신당한 이 여인은 치밀어 오르는 광기를 어쩌지 못한 채 내내 몸부림치고 허우적댄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서슴지 않지만 결국 모든 걸 잃고 파멸하는 여인, 메디아. 신화 속 최고의 악녀가 지금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연극 ‘메디아’에서 ‘메디아’(오른쪽·이혜영)는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남편 ‘이아손’(왼쪽·하동준)을 향한 극한의 분노를 처절하게 표현한다.  국립극단 제공
연극 ‘메디아’에서 ‘메디아’(오른쪽·이혜영)는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남편 ‘이아손’(왼쪽·하동준)을 향한 극한의 분노를 처절하게 표현한다.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 연극 ‘메디아’는 그리스 극작가 에우리피데스가 쓴 동명의 비극이 원작으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한 여인이 복수를 감행한 뒤 파국을 맞는다는 내용을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이야기로 풀어냈다. 콜키스의 공주 ‘메디아’는 남편 ‘이아손’을 위해 부모와 조국을 배반하고 코린토스로 떠나온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한 이아손은 자신을 버리고 크레온 왕의 딸과 결혼하기로 한다. 크레온 왕은 후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메디아에게 아들들과 함께 코린토스를 떠나라고 명령한다. 오갈 곳 없는 메디아를 불쌍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이아손은 자신의 선택이 가문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변명한다. 분노에 사로잡힌 메디아는 크레온 왕과 왕의 딸은 물론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제 손으로 죽이는 끔찍한 선택을 하고 결국 자신도 이아손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메디아를 둘러싼 유모와 15명의 코러스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악에 받친 메디아를 연민하다가도 자녀를 죽이는 그녀의 잔인한 모습에 비난을 퍼붓는다. 국립극단 제공
메디아를 둘러싼 유모와 15명의 코러스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악에 받친 메디아를 연민하다가도 자녀를 죽이는 그녀의 잔인한 모습에 비난을 퍼붓는다.
국립극단 제공
메디아가 입은 붉은색의 힘없는 저지 드레스는 기구한 운명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 그녀의 참담한 심정을 대변한다. 국립극단 제공
메디아가 입은 붉은색의 힘없는 저지 드레스는 기구한 운명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 그녀의 참담한 심정을 대변한다.
국립극단 제공
헝가리 연출가 로버트 알폴디는 어둡지만 아름다운 남녀 간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책임,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 집중했다. 하지만 알폴디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부분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엇갈린다. 특히 원작과 다르게 결말에서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이는 장면에 대해 김숙현 연극평론가는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폭력성에 휘둘린 여성을 표현한 것 외에 동시대성을 반영한 새로운 해석의 파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원작에 비해 그 역할이 확대된 15명의 여성 코러스들에 대해서도 메디아와의 끊임없는 호흡을 통해 극의 리듬감을 창출했다는 반응과 함께 상대적으로 대사 전달이 고르지 않아 극의 주제를 드러내는 데 무리가 있었다는 반응이 공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디아를 메디아답게 표현한 배우 이혜영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인간 내면의 복합적인 감정을 치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여배우로 이혜영 외에 다른 사람을 꼽기 힘들다는 평이다. 김방옥 연극평론가는 “소외감과 복수심에 휩싸인 한 여자가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 분열적인 상황에서 맞이하게 되는 다층적인 심리 상태를 탁월하게 소화해 냈다”고 말했다.

생애 처음으로 연극 의상에 도전한 진태옥 디자이너의 의상도 주목할 만하다. 극 초반 맹목적인 분노와 고통에 휩싸인 메디아는 검은색 벨벳 드레스와 실크 망토를 걸치고 등장한다. 후반부 힘없이 아래로 축 처진 붉은색 저지 드레스는 복수를 위해 자식까지 죽이고 어떠한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메디아를 나타낸다. 메디아가 자녀를 살해하는 잔인한 장면 등이 포함된 까닭에 20세 이상만 관람할 수 있다. 4월 2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1644-2003.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2017-03-13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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