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날씨에 텐트서 버텨”… 살아남은 이들도 추위·굶주림과 싸운다
공항 전광판, 검은 근조 리본가족과 연락 안 닿아 ‘발 동동’
“피난처 없어 맨바닥서 지내”
2세 아기 구조한 韓구호대
대한민국 긴급구호대(KDRT)가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하타이주 안타키아의 무너진 건물 속에 갇혀 있던 두 살 어린이를 구조한 뒤 밖으로 나오고 있다.
안타키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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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5시 30분(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 공항에서 만난 카밀(33)은 초조한 표정으로 충전 중인 휴대전화를 계속 들여다보며 친구들과의 단체 메신저방을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영국 런던에서 전날 밤 귀국해 고향인 카라만마라슈로 향하던 카밀은 “지진 이후 어머니, 남동생과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며 “동네 친구들이 한 남성의 구조 영상을 보내 주며 ‘네 남동생이 아닌 것 같다’고 했지만 영상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남성의 얼굴과 키, 실루엣 모두 제 동생 같아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규모 7.8의 지진이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 북부 국경 지역을 강타한 지 나흘째인 이날 이스탄불 공항 국내선 환승장은 지진 소식을 듣고 귀국한 현지인들과 해외 구조대원들로 북적였다. 공항 곳곳에 설치된 전광판에는 ‘지진이 튀르키예를 덮쳤다’는 문구와 함께 검은색 근조 리본이 표시돼 있었다. 탑승구 앞에서 대기하던 승객들은 지진 현황과 구조 속보를 내보내는 뉴스를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안탈리아와 하타이, 아디야만 등 지진 피해를 본 도시로 가는 국내선 항공편 결항 소식에 승객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전광판을 연신 올려다봤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일하다 급히 귀국한 튀르키예인도 있었다. 경기 안산의 공장에서 일한다는 살추쿠(26)는 이즈미르에 살던 약혼자의 비보를 접하고 이날 새벽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다. 살추쿠는 “늦어도 내년에는 여자친구와 결혼하려고 한국에서 일하며 결혼 자금을 모으고 있었는데, 어제 친구로부터 여자친구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며 “아직 실감이 안 나는데 이즈미르로 가는 비행기도 취소될 수 있다고 해 마음이 급하다”며 울먹였다. 살추쿠의 옆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던 동료 역시 남동생이 사망해 함께 귀국했다고 했다.
몰디브에서 근무하던 중 지진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이스마일(40)은 담요와 카펫 같은 구호 물품을 구입해 가져가는 중이었다. 이스마일은 “다행히 가족과 친구들은 살아남았지만, 집이 무너지고 피난처도 없어 맨바닥에 설치한 텐트에서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며 “도로가 다 파괴돼 구호 물품도 빨리 전달되지 않는다고 해서 급한 대로 친구가 지내는 텐트에라도 깔 카펫을 가져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병을 앓고 있는 친구의 다섯 살짜리 아들은 병원이 다 무너지고 그나마 남은 병원조차 지진 피해자들로 가득 차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며 “친구들에게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살아남은 이들도 힘든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오후 2시 피해 지역에서 가까운 아다나 공항은 참사 현장에서 빠져나온 튀르키예인들과 다른 지역에서 온 자원봉사자, 구호단체 관계자들이 뒤섞여 혼잡했다. 공항 내 자판기는 물 외엔 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비어 있었다. 승객들은 피해 지역에 가져가기 위해 1.5ℓ 생수 묶음, 비닐봉지에 담은 음식, 각종 상비약과 같은 구호 물품을 챙겨 왔다.
이스탄불에서 사람 몸집만 한 마대 수십 개를 가져온 애미네굴(29)은 “하타이에 있는 병원에 검시용 약물을 전달하러 버스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라며 “도로가 파괴돼 갈 수 없다는 말은 들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가야 한다”고 했다. 영국의 한 시민단체에서 왔다는 메릴(46)은 “피해 지역 식당과 피난처를 찾아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줄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항 출국장에는 참사 현장에서 탈출하려는 튀르키예인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패딩을 입어도 추운 영하의 날씨인데 슬리퍼만 신고 있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언니와 함께 안타키아에서 왔다는 할리매(16)는 “엄마가 있는 이스탄불로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이스탄불에 있냐’고 묻자 “아빠와 오빠는 무너진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며 울먹였다.
가족들과 함께 빠져나온 가제(22)는 “집이 완전히 무너져 길거리에서 이틀을 보냈다”며 “아직도 집 건너편 빌딩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소리치던 게 생생하다. 그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했다”고 토로했다. 대한민국 긴급구호대가 활동에 돌입한 지역이기도 한 안타키아는 피해가 심한 지역 중 한 곳이다.
시내 마트에선 이불, 석탄 같은 구호 물품이 순식간에 동나고 생수, 쌀, 콩 등 비상식량도 진열대에 놓자마자 바로 사라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튀르키예 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물, 식량, 연료 등을 구하지 못해 ‘2차 위기’에 처했다며 긴급 지원을 호소했다.
딸 손에 마지막 키스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 강진에 희생된 딸을 찾아 시리아에서 온 어머니가 9일(현지시간) 국경 지역인 튀르키예 레이한르 질베괴쥐 지역에서 마주한 딸의 차가워진 손에 마지막 굿나이트 키스를 하고 있다. 지진과 여진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깔린 이들을 구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혹한 속에서 ‘골든타임’ 72시간이 소진돼 감에 따라 희망이 꺾여 가고 있다.
질베괴쥐 AP 연합뉴스
질베괴쥐 AP 연합뉴스
해외 24개국 이상에서 모인 구조대원들은 ‘골든타임 72시간’ 안에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 긴급구호대는 이날 안타키아에서 70대 중반 남성 한 명을 구조한 데 이어 무너진 5층 건물 사이에서 일가족 3명을 추가로 구출하는 등 모두 5명의 생존자를 구조했다.
한편 튀르키예 정부의 구조 작업이 느리고 인력·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비판 여론이 확산하는 가운데 현지에선 트위터 접속이 차단돼 구조 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대학에 다니는 수(20)는 “사람들이 트위터에 자신이 고립된 위치를 올리며 구조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어제부터 정부가 트위터에 정부 비판이 올라온다는 이유로 접속을 차단했다”며 “젊은 사람들은 우회접속프로그램(VPN)을 통해 접속하고 있지만 당장 구조 요청을 하던 사람들이나 그런 방법도 공유받지 못한 사람들은 위치조차 알릴 수 없어 구조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2023-02-1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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