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일하다 94세 때 은퇴해 파키스탄 제2의 도시 라호르에 있는 에이치슨 칼리지에 딸린 오두막에서 지내던 랭글랜즈가 지난 2일(이하 한국시간) 편안히 생을 마감한 채로 제자의 눈에 띄었다고 영국 BBC가 5일 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1917년 10월 영국 요크셔주에서 쌍둥이 형제 중 한 명으로 태어났지만 이듬해 아버지가 병으로 숨져 어머니와 브리스톨 외가에서 지냈다. 어머니마저 열두살 때 세상을 등져 친척들의 집을 전전했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데본주 킹스 칼리지에 입학할 수 있었고 졸업 뒤 런던 남부 크로이돈의 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자원 입대, 특수부대원으로 1942년 끔찍했던 디에페 습격에 동원됐다. 2년 뒤 인도에 진주하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대영제국의 몰락을 목격하고, 1947년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 군대에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라호르를 처음 찾았다.
학생들과 함께 파키스탄의 북부 산악 지대를 트레킹하는 것이 랭글랜즈(뒷줄 오른쪽) 소령의 큰 즐거움이었다.
파키스탄 기업인 하룬 라시드의 전언에 따르면 1950년대 초반 군부 통치자인 아유브 칸이 랭글랜즈에게 장래 계획이 뭐냐고 묻자 그는 “병사 이전에 교사였다.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답했다. 아유브가 “파키스탄에 교사가 부족하니 직접 가르쳐보라”고 했고, 랭글랜즈는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해서 1960년대 에이친스 칼리지가 라호르에 세워졌고 그는 25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과 함께 북부 산악지대를 돌아다닌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한 미국 대사는 농담으로 각료의 절반이 그의 제자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제자들로는 한 명의 대통령, 임란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가 스승을 추모하며 올린 트위터 글.
1979년 아프가니스탄과 접경을 이루는 북부 와지리스탄 산악지대의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옛 소련의 침공, 9·11 테러, 미국과의 전쟁 등이 있기 훨씬 전이었지만 당시도 무법 천지라 사람들이 말렸다. 하지만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1988년 피랍됐다. 엿새 뒤 풀려났고 납치범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해 말 더 큰 치트랄 학교를 맡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시 그 지역을 찾은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와 만났다. 처음 80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94세로 은퇴했을 때 800명으로 불어났다. 그는 일류 대학의 장학금을 받는 남학생 숫자보다 여학생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여겼다.
페샤와르 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된 파랏 타마스는 “내가 입학한 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낡은 옷과 짝짝이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랭글랜즈 소령님이 날 격려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가르쳐주셨다”며 “내가 교수 직을 얻었을 때도 소령님을 위해 사탕을 가져갔다. 스승은 여학생들에게 다시 나눠주며 ‘언젠가 너희들 모두 사탕 하나씩 가져다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 돌아봤다.
에이치슨 칼리지 학생이었던 알리 시브타인 파즐리는 “고귀한 한 사람의 이름만 꼽으라면 난 제프리 랭글랜즈를 꼽겠다”고 했다. 랭글랜즈 자신은 2010년 BBC 인터뷰를 통해 평생을 지켜온 신조 하나가 있었다며 열두살 때 개인적으로 인생의 모토를 “선한 이가 되자, 선한 일을 하자(Be good, Do good)”로 정했고 그걸 좇아 살아왔다고 털어놓았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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