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매체 “락까에서 살아남은 주민들 악몽의 나날 전해”
IS, 민간인 방패용 주민 탈출 막으려 사살…밤낮없는 공습에 “흑사병의 늪” 방불그날 밤, 아이만 오갈라(56)는 부인, 자녀 3명과 함께 1층 화장실에 숨어서 밤새 터지는 폭탄 소리를 50번까지 셌다. 51번째 폭탄은 그들 몫이었다. 집이 모두 날아갔지만, 튼튼하게 지어진 화장실은 용케 버텼다.
“공습에 비산한 주민들 살점들을 개·고양이가 먹고 있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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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 극단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수도’격이었던 락까가 미군의 지원을 업은 시리아민주군(SDF)의 총공세에 함락되기 수일 전, 그때까지 락까에서 피난하지 못하고 있었던 주민들이 겪은 참혹한 정경을 영국의 더 타임스는 21일 이같이 전했다.
락까 해방 후 수용소 천막에서 오갈라가 옛 이웃들을 만나 “이런 일을 역사책에서 읽긴 했지만 나에게 닥칠 것이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며 얘기를 마무리할 무렵, 같은 천막에 있던 레일라 나짐 알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울면서 천막 문 쪽으로 뛰어갔다. 천막 안으로 막 들어서던 남자 형제 아메드 나짐 알리(48)는 그녀를 부둥켜안고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레일라 나짐 알리는 열네 살 아들 등 가족과 함께 6번째 옮긴 자신의 거처를 사이에 두고 SDF와 IS간 총포탄이 빗발치듯 허공을 가른 공포의 밤을 지새우고 살아남았다. 아침이 오고 총격이 잠잠해진 후 제복을 입은 사람이 보인다는 말에 SDF가 이긴 줄 알았다.
오갈라, 레알라 나짐 알리 등과 함께 같은 수용소에서 만난 동네 이웃인 압둘라만 수에이하(47)는 집 문 앞의 폐허 속에 새로 난 타이어 자국을 보고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IS군 차량은 남아난 게 없기 때문에 해방군의 차량일 수밖에 없었다.
4개월 전 SDF의 락까에 대한 포위 공세가 시작됐을 땐 IS의 통치하에 공개 처형, 소소한 재산권 소송, 시리아 정권과 수백만 달러짜리 사업 계약 등 이전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수에이하는 IS가 자신의 집을 검문소로 징발한 것에 저항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IS에 대해 소송을 걸었다. IS가 과거 법치를 선언했기 때문에 혹시나 했던 것인데 결론은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끝났다.
내전 전 부동산 중개업을 했던 아부 마무드(50)는 IS에 송유관을 파는 500만 달러짜리 계약을 추진하다가 SDF의 포위 공격과 함께 무산됐다.
아메드 나짐 알리는 물을 구해오도록 아들을 다른 동네에 보냈다가 쿠르드 간첩 혐의로 체포돼 “처형된 후 개 먹이로 던져졌다”는 말을 당시 석방된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알리는 그 날 밤 더는 버티지 못하고 심야를 틈타 남은 가족을 데리고 IS의 감시망을 피한 탈출로를 알고 있는 업자에게 찾아가 살아남았다.
약 4년 전 전 락까를 접수한 IS는 정상 국가 운영을 내걸었지만 그들의 지배는 야만과 힘으로 점철됐고, 마지막은 락까의 파괴로 귀착했다.
타임은 IS 통치 4년, 또 포위 공격과 폭격으로 지샌 마지막 4개월간 락까 주민들이 ‘죽음의 늪’에서 보낸 악몽 같은 그림이 주민들의 설명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전했다.
공개 처형은 IS가 락까를 장악한 지 수일 내에 시작됐고, 4개월 전 SDF의 포위 공세가 시작됐을 때도 계속되고 있었다.
기술자인 오갈라는 지난 6월 한 남자가 알려지지 않은 죄목으로 머리에 총탄을 맞고 처형된 후 광장을 굽어보는 광고판에 사흘간 내걸린 것을 보고는 자신의 최후를 보는 듯했다. 수용소에 만난 오갈라는 “나는 IS가 이슬람을 중세 암흑시대로 되돌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SDF의 포위 공세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락까엔 주민 수만 명이 남아 있었다. IS가 최후의 저항지로 선택한 땅에서 일어날 죽음과 파괴가 어떠할지 오갈라는 예감할 수 없었다. 이라크 모술에서 IS가 패퇴한 마지막 전투가 아직 벌어지기 전이었다.
처음엔 IS의 보안 강화 조치가 취해졌다.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부터 목표물을 보호하기 위해 민간인 방패가 필요했던 IS는 주민들의 탈출을 막으려 탈출 시도자들을 사살했다.
오갈라의 이웃 아부 알리는 부인, 아이들, 부모 등 13명의 대가족을 데리고 동트기 전인 오전 3시 탈출에 나섰다가 시계탑까지밖에 못 가서 IS 저격병에게 걸렸다. 저격병은 아부 알리와 부인, 그리고 다른 5명을 한 사람씩 쏴 죽였다. 항복한 7명 중 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체첸인으로 보이는 저격병은 웃으면서 ‘잡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8월이 되자 야채는 더 이상 구경하지 못하게 됐고, SDF의 포위망이 좁혀짐에 따라 민간인들은 폭격을 피해 점점 더 좁은 지역으로 내몰렸다. IS가 지붕에 방어 진지를 차리는 속속 그 집은 공습 목표물이 돼 파괴됐다. 폭격은 30분 단위로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런 만큼 거리는 폐허로 뒤덮이고 그 아래에 깔린 시신들은 수습이 불가능한 채 여름날 열기에 썩어들어갔다.
9월엔 통조림 식품도 남지 않게 됐다. 새로 판 우물엔 물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고 일반 시민은 하루 20ℓ, IS 대원 가족은 100ℓ씩 배급받았다.
마지막 3주간은 최악이었다. 밤낮으로 폭탄이 떨어지면서 어느 날 아침엔 40명, 다음 날은 60명, 이런 식으로 죽어갔다.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이 쫓겨 들어간 락까 중심에서 서북쪽의 알 바두 동네엔 산 자와 죽은 자가 엉킨 채 몰려 있는 “흑사병의 늪”이 됐다.
오갈라 가족이 숨어있던 집 지붕엔 이집트 출신의 IS 대원이 로켓 발사기를 갖고 올라가 있었다. 이 집에 피신해 있던 민간인 60명은 보복 공습 걱정 때문에 그 IS 대원에게 제발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애원했다. 그 대원은 거절하다가 이웃집으로 옮겨갔는데 어느 날 그 이웃집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오갈라 가족이 숨어있던 집도 락까 함락 수일 전 폭격을 맞았으나 오갈라 가족은 튼튼한 화장실에 피해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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