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몰아낸 아랍국가, 그 후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해피엔딩은 동화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은 처절한 투쟁 끝에 독재자를 축출했지만 정치적·경제적 혼란은 여전하거나, 오히려 악화됐고 삶은 더 피폐해졌다. 아프리카·중동 국가들의 민주화 혁명 이후를 진단해 본다.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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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는 2011년 중동을 휩쓴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의 발원지다. 아랍의 봄은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청과물 노점상을 운영하던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로 시작됐다. 그는 무허가 노점이라는 이유로 청과물 수레를 빼앗기고 경찰에 구타당했다. 궁지에 몰린 부아지지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마지막 저항을 했다. 그는 이듬해 1월 4일 숨졌다.
대중은 부아지지의 절망에 공감했다. 분노가 들불처럼 번졌다. 튀니지 전역에서 반(反)독재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정권은 시위대에 폭력을 휘둘렀다. 최소 338명이 사망했다. 시위는 더 격화됐다. 2011년 1월 14일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당시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했다. 23년 독재의 종지부였다.
튀니지의 승리는 ‘재스민 혁명’이라고 불렸다. 재스민은 튀니지의 국화(國花)다. 혁명은 주변 국가들의 연쇄적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튀니지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혁명 후 민주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는 데 실패했다.
중동 유일의 민주혁명국 튀니지의 현 상황은 처참하다. 정국 불안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경제난까지 심화되고 있다. 현재 튀니지의 실업률은 15%가 넘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청년 실업률은 이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민주화 이전 실업률은 13%였다.
좌절감과 상실감에 젖은 튀니지 청년들은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분신 횟수는 혁명 전보다 3배 이상 증가했다. 혁명을 촉발했던 분신이 이제는 절망을 표현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지난해 수도 튀니스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해 화상병원으로 이송된 시민은 104명이다. 화상병동의 의사 아멘 알라 메사딘은 “2011년 이후 연평균 80명 이상이 분신을 해 병원에 온다”면서 “분신은 튀니지에서 두 번째로 많은 자살 방식이다. 문제는 분신이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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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국민들은 치열한 민주화 시위를 통해 2011년 2월 11일 ‘파라오’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을 축출했다. 무바라크는 권좌에서 밀려나기까지 30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무함마드 무르시가 2012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3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압둘팟타흐 시시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집권 1년 만에 쫓아냈다. 그는 2014년 형식적인 선거를 거쳐 대통령이 됐다.
철권통치가 시작됐다. 시시 대통령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시위대에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는 약 1300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USA투데이는 시시 정권이 반정부 단체인 무슬림형제단원 2200여명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약 4만명의 정치범을 구금했다고 보도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이집트가 시위를 거의 금지하고 수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며 현지의 대표적 반정부 단체인 무슬림형제단을 불법조직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시 정권의 탄압이 무바라크 전 대통령 재임 당시보다 심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BBC는 “무바라크 정권 때 허용됐던 집회·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억압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경제는 늪에 빠졌다. 지난 8월 이집트의 물가상승률은 31.92%였다. 무바라크 집권 말기 물가상승률은 15%를 넘지 않았다. 이집트의 급격한 물가상승은 지난해 11월 이집트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한 데 따른 것이다. 시시 정권은 차관 120억 달러를 확보하려고 국제통화기금(IMF)의 개혁 조건을 수용했다.
리비아는 42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당시 국가원수를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내전이라는 몸살을 앓았다. 2011년 2월 15일 카다피 정권 퇴진 시위가 시작됐다. 카다피는 2월 20일부터 시민군을 무력 진압했다. 시위에 참여한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
국제사회는 카다피의 인권 유린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했다. 유엔은 2월 26일 카다피 정권에 대한 제재를 결의했다. 3월 3일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카다피가 재임 기간 중 저지른 범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3월 19일 미국과 유럽 연합군은 리비아 본토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연합군이 참전하면서 리비아 반정부 시위는 시민군 대 정부군의 내전 양상을 띠게 됐다. 연합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시민군은 8월 19일 리비아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카다피는 10월 20일 자신의 고향 시르테의 은신처에서 발각됐다. 시민들의 손에 끌려나온 카다피는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독재자는 죽었지만,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2012년 선출한 제헌의회 총국민회의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총국민회의 임기가 끝난 2014년 6월 문제가 불거졌다. 곧바로 치러진 총선에서 패배한 이슬람계 무장단체 ‘파즈르 리비아’(리비아의 여명)는 선거를 무효라고 선언하고 트리폴리에 이슬람계 제헌의회(GNC)를 수립했다. 비이슬람계 세력은 동부 투브루크로 피신해 별도의 국민의회(HoR)를 세웠다. 이로써 리비아는 서로 합법 정부를 자처하는 양대 세력으로 양분돼 내전을 이어 갔다. 유엔의 중재로 2016년 3월 트리폴리 정부와 투브루크 정부 사이에 통일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 리비아 통합정부(GNA)가 출범했었다. 그러나 국민의회가 합의를 파기했다. 유엔은 양측의 통합정부를 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가산 살라메 유엔 리비아 특사가 통합정부를 이끄는 파예즈 사라지 총리와 국민의회를 지지하는 칼리파 하프타르 리비아국민군(LNA) 사령관을 만났다. 유엔은 내년 7월쯤 대통령선거와 총선을 치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알리 압둘라 살레 전 예멘 대통령.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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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간 집권했던 알리 압둘라 살레 당시 예멘 대통령은 2012년 민주화 시위로 축출당했다. 이후 민주적 정권 이양 절차가 진행됐다. 그러나 높은 실업률과 정부의 연료비 인상이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켰다. 2014년 9월 이란에 우호적인 시아파 반군 후티가 수도 사나를 점령하고 예멘 정부를 몰아냈다.
남쪽 국경을 예멘과 맞대고 있는 아랍권 수니파 맹주 사우디아라비아가 개입했다. 사우디는 아랍권 동맹군을 결성해 2015년 3월 26일 참전했다. 예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내전으로 지금까지 민간인 8000여명이 숨졌고 4만 5000명이 부상당했다. 곳곳에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하수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오염된 우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시민이 많아졌다. 그러자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가 창궐했다. 올해 4월 콜레라가 창궐한 이후 3달 동안 54만 2000명이 감염됐고 그 가운데 2000명이 사망했다.
애덤 로버츠 영국 옥스퍼드대 국제관계 수석연구원은 “독재자, 부패한 정치인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주주의 제도를 구축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면서 “시민들은 단지 독재자를 제거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2017-10-1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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