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공무원 사회의 붕괴가 시작됐다”…‘국회의원 횡포에 보람없는 과로, 더는 못참아’ 줄줄이 이탈

“日 공무원 사회의 붕괴가 시작됐다”…‘국회의원 횡포에 보람없는 과로, 더는 못참아’ 줄줄이 이탈

김태균 기자
입력 2023-05-22 14:38
수정 2023-06-26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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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퇴근에 아침 9시 출근...욕은 욕대로”
유능한 인재 관직 이탈에 일본사회 위기감 고조
올해 종합직(5급) 채용 응시 1996년의 32%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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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회의사당. 김태균 기자
일본 국회의사당.
김태균 기자
전직 외교관 “일본 관료 사회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될 수도” 우려“사적인 요구를 안 들어줬다고 예산 통과에 훼방 놓는 국회의원들, 공무원에게 큰 소리로 분노를 발산하려는 사람들. 정치인과 언론으로부터 욕을 먹는 가운데 매일 이어지는 야근. 이래서는 일할 의욕도 안 생기고 가정도 꾸려나갈 수가 없다.”

일본에서 정부 부처 공무원에 대한 인기와 위상 하락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는 가운데 외무성 고위 관료 출신 인사가 유능한 인재가 관직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근본적인 원인 처방을 촉구했다.

시사 평론가 가와토 아키오(76)는 지난 20일 뉴스위크 일본판 기고를 통해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일본 관료 사회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가와토 평론가는 외무성 관료 출신으로 주러시아 일본 대사관 공사, 우즈베키스탄 대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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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부부처(성청)들이 밀집해 있는 도쿄 중심부 가스미가세키 지역.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과천’이나 ‘세종’과 같이 ‘가스미가세키’가 관가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굳어져 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일본의 정부부처(성청)들이 밀집해 있는 도쿄 중심부 가스미가세키 지역.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과천’이나 ‘세종’과 같이 ‘가스미가세키’가 관가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굳어져 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그는 일신상 이유로 퇴직한 20대 종합직(한국으로 치면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 합격자) 공무원이 2013년에는 21명에 불과했지만, 2019년에는 86명으로 치솟았다는 수치를 제시한 뒤 공무원들의 이탈을 부추기는 현재의 근로 여건을 강하게 비판했다.

가와토 평론가는 “정부에서 당일 근무 종료 후 다음 날 근무 시작 때까지 원칙적으로 11시간은 지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나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이는 실현 불가능한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새벽 3시에 퇴근해 고작 몇 시간 자고 아침 9시까지 출근하는 경우도 있는 상황에서 11시간 의무 휴식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런 조치보다는 근무 시간이 길어지는 이유를 분석하고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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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앙부처들이 모여 있는 도쿄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 지구.
일본 중앙부처들이 모여 있는 도쿄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 지구.
“밤새 자료를 만들어 다음 날 아침 일찍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가와토 평론가는 ‘일본 사회가 연락과 조정을 중시하다 보니 국회의원 등에게 설명할 것이 많은 점’, ‘국회의원들이 대신(장관) 등과 큰 틀의 논의를 하려 들지 않고 세세한 질문까지 답하도록 해 꼬투리를 잡으려는 경우가 많은 점’, ‘예산편성 시즌이 되면 재무성 주계국(한국의 기획재정부 예산실)의 주사급 직원들까지 한밤중에 급하게 부처 관료들에게 자료를 요구하는 점’ 등을 열악한 근로환경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이런 일들의 필요성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비합리적인 것도 많다”고 했다.

“부처 과장들을 불러 설명을 요구하는 게 특기인 국회의원이 많고 총리나 장관이 국회 질의응답 때 헤매지 않도록 밤새 자료를 만들어 다음 날 아침 일찍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자기가 맡은 정책에 예산이 책정되게 하려고 밤늦게까지 대기하고, 주계국 주사급 직원의 전화에도 바로 달려가야 한다. 이렇게 한들 초과근무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와토 평론가는 “외교 협상이나 고위인사의 외국 방문을 앞두고는 과장은 의자에서, 직원들은 책상이나 소파에서 가수면을 취하는 게 보통”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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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부부처들이 밀집해 있는 도쿄의 한복판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 지구. 후생노동성(오른쪽) 등 정부청사들이 저녁 6시가 지났는데도 잔업하는 공무원들로 환히 불을 밝히고 있다. 김태균 기자
일본의 정부부처들이 밀집해 있는 도쿄의 한복판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 지구. 후생노동성(오른쪽) 등 정부청사들이 저녁 6시가 지났는데도 잔업하는 공무원들로 환히 불을 밝히고 있다.
김태균 기자
“자기의 사적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외무성 예산의 국회 승인을 방해하거나, 부처 간부들에 압력을 넣어 담당자를 경질하라고 윽박지르는 의원들이 정말 싫었다. 몇몇 공무원들의 비리를 갖고 마치 외무성 전체가 비리 집단인 것처럼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공무원에 대해 ‘대단한 사람들’이라거나 ‘상명하복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라고 했다.

“많은 부처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간에 논의하고, 각종 정책이 상명하복보다는 상향식 협의를 통해 수립되는데도 위에서 압력을 가하면 움직여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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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다로 일본 행정개혁담당상 로이터 연합뉴스
고노 다로 일본 행정개혁담당상
로이터 연합뉴스
‘커리어 관료가 되어 가스미가세키에서 생활’ 동경은 이제 옛말그는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공무원의 근무 환경은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어떤 사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다면 아무리 일률적으로 휴식 시간을 의무화해도 3~4시간만 잠을 자고 다시 나가야 하는 악순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능한 인재가 관료가 되기를 꺼리는 현상에 대한 일본 사회의 위기감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일본 정치인 가운데 개혁적 성향으로 유명한 고노 다로 디지털담당상(전 외무상)은 지난해 9월 22일 일본기자클럽 회견에서 “최근 장래의 에이스라고 촉망받던 한 부처 공무원이 사직하겠다고 얘기하러 나를 찾아왔다”며 “가스미가세키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스미가세키’는 일본 중앙부처 관가를 상징하는 말이다. 한국 공무원 사회의 대명사가 과거 ‘과천’에 이어 현재 ‘세종’인 것처럼 일본에서는 근대화 이후 줄곧 가스미가세키로 통했다. 도쿄 중심부 지요다구에 있는 가스미가세키 지구에 재무성, 경제산업성, 농림수산성, 외무성, 법무성, 후생노동성, 문부과학성 등 대부분 중앙부처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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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25일 중의원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벚꽃 모임 전야제 논란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2020.12.25. 로이터 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25일 중의원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벚꽃 모임 전야제 논란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2020.12.25.
로이터 연합뉴스
종합직 공무원 시험을 통해 ‘커리어’(간부직) 관료가 돼 가스미가세키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오랫동안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됐지만, 지금은 경쟁률 자체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떨어졌다.

일본 정부 인사원에 따르면 올해 종합직 시험 응시자는 1만 4372명으로 역대 최다였던 1996년 4만 5254명의 32% 수준에 그쳤다. 2019년 응시자 2만명 선이 처음 무너진 이후 줄곧 가파른 하락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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