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반서 1명 넘긴 아들 부시… 대법 결정으로 백악관 입성

과반서 1명 넘긴 아들 부시… 대법 결정으로 백악관 입성

이기철 기자
이기철 기자
입력 2020-10-26 17:14
수정 2020-10-27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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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사이트] 흥정하고 후보자 숨지고… 美 역사상 기묘했던 대선 결과들

일주일 앞으로 임박한 올해 미국 대선은 역대급 혼란이다. 미 역사상 59번째 대선인 올해는 코로나19의 재유행에 따라 우편투표와 사전투표가 급증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현재 이미 우편투표를 한 유권자가 6000만명에 육박한다. 사전투표나 우편투표가 많으면 선거 당일의 출구조사를 빗나가게 할 수 있다. 경합주인 위스콘신 등 14개 주의 경우 우편투표의 최종 개표 결과가 12월에서야 나올 수도 있다. 특히 우편투표와 현장투표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민주당 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개표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초박빙의 표차도 당락을 좌우할 수 있어 논란이 될 수 있다. 실제로 2016년 펜실베이니아주에서는 트럼프가 0.7% 포인트를 더 얻으면서 선거인단 20명을 독식했다.대통령제 민주주의를 창안한 미국에서 대통령 선출이 항상 공정하고 신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한 후보가 없어 밀실 흥정과 매수, 후보자의 사망 등의 혼란도 많았다. 미국 역사상 기묘했던 대선 결과를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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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8년 11월 4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자신이 대선에 패했다는 대형 오보를 낸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로 제작한 이 신문사의 오보는 두고두고 반추된다. AP 연합뉴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8년 11월 4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자신이 대선에 패했다는 대형 오보를 낸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로 제작한 이 신문사의 오보는 두고두고 반추된다.
AP 연합뉴스
25일 CNN과 BBC 등에 따르면 미국 대선의 혼란은 토머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가 경쟁한 18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거인단은 2명에게 투표할 수 있었다. 최다 득표자가 대통령,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는 구조였다. 대선에 나설 때 제퍼슨은 러닝메이트로 애런 버를 선택했다. 그런데 소통의 착오인지, 버의 반란인지 이들의 선거인단 수가 73표로 같았다. 현직인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65표였다. 선거인단 과반 확보자가 없어 대통령 선출은 의회로 넘어갔다. 제퍼슨의 정적이자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하원에 제퍼슨에게 표를 몰아주도록 설득했다. 해밀턴에 의해 제퍼슨에게 대통령 자리를 놓친 버는 3년 뒤 해밀턴에게 복수했다. 부통령 신분인 그는 결투에서 해밀턴을 살해했다. 이후 헌법은 개정을 통해 선거인단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 투표하도록 규정했다.

대선 투표에서 더 많이 득표하고도 대통령 자리를 놓친 것은 1824년 앤드루 잭슨이 처음이었다. 전쟁 영웅 잭슨은 최소 3만 9000표를 더 얻고 선거인단 99명을 확보한 상태였다. 경쟁자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이 선거인단 84명을 붙잡아 차점자였다. 나머지 두 후보가 78명을 차지했지만 과반 확보자가 없어 대통령 선출은 하원으로 넘어갔다. ‘워싱턴 아웃사이더’ 잭슨은 투표와 선거인단에서 가장 앞섰던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으로 믿었다. 한 달이 넘게 걸린 밀실 협상에서 하원은 애덤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시 헨리 클레이 하원 의장이 애덤스를 밀어주는 대가로 국무장관에 임명됐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대명사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선출 과정은 노예 해방 문제로 찢긴 미국의 분열상을 고스란히 보여 줬다. 1860년 대선 당시 민주당은 스티븐 더글러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노예 문제로 찢어진 당시 남부 주들은 존 브레킨리지 부통령을 후보로 내세우면서 민주당의 공식 대선 후보가 2명이 됐다. 링컨이 승리하자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연방에서 독립한다고 투표했고, 남부 6개주가 이에 가세했다. 결국 남부 주들은 1861년 2월 제퍼슨 데이비스를 남부연합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코로나19가 대유행 중인 올해 후보들의 연령대가 70대 후반으로 만만찮다. 대선 후보가 도중에 사망하면 어떻게 될까. 1872년 대선에서 언론인 호러스 그릴리는 대선 출마 욕심이 없었지만, 현직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의 인기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그릴리는 민주당 후보였지만 공화당 일부가 그랜트에게 반기를 들고 자유공화당을 만들고, 그릴리에게 베팅을 했다. 2개 정당의 대선 후보가 된 그릴리는 투표 5일 전 부인이 사망하자 유세를 중단했는데도 일반투표에서 약 300만표 즉 44%를 차지했다. 그는 선거인단 투표를 앞둔 1872년 11월 29일 사망하면서 적법한 후보 자격을 상실했다. 그가 확보한 선거인단 표가 나머지 후보들에게 가면서 그랜트는 재선에 여유 있게 성공했다.
기묘한 미국 대선 일지
기묘한 미국 대선 일지
4년 뒤인 1876년 대선은 대법관 한 명이 대통령을 결정한 선거로 기록된다. 민주당 후보 새뮤얼 틸던이 공화당의 리더퍼드 헤이즈보다 투표에서 25만표, 선거인단에서는 19명을 더 확보했다. 문제는 선거인단 과반인 185명에 1명이 부족했다. 플로리다·루이지애나·사우스캐롤라이나·오리건주가 개표 논란이 일면서 4개주 선거인단 20명의 행방이 결정되지 않았다. 민주·공화 양당은 서로 이겼다면서 상대 당을 사기라고 비난했다. 선례가 없었던 두 당은 15명의 선거위원회를 구성했다. 공화당 7명, 민주당 7명에 무소속 대법관 한 명으로 구성, 주별 선거 결과를 결정하기로 했다. 선거위원회의 주별로 표결을 한 결과 8대7로 공화당의 헤이즈가 4개주 선거인단 20명을 모두 차지했다. 중립을 지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무소속의 대법관 조지프 브래들리가 골수 공화당원이었던 것이다.

대선 결과에 대한 여론조사와 매체의 보도가 크게 빗나간 것은 2016년에 앞서 1948년이 있었다. 공화당의 해리 트루먼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0% 남짓했다. 2년 전의 중간 선거에서 상·하원이 거의 20년 만에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반면 경쟁자 토머스 듀이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에 대한 트루먼의 외교정책에 반기를 든 상무장관 헨리 월리스가 제3당을 만들어 출사표를 던졌다. 흥미로운 점은 10월 중순에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듀이가 5% 포인트 이상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선거 전날에서야 공개됐다는 점이다.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잠든 트루먼은 경호원이 새벽 4시 잠을 깨워 승리 소식을 전하고서야 알았다. 당시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사설에서 선거 준비에서 투표까지 투르먼을 ‘바보’라고 불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쇄공의 파업 때문에 조간판을 평소보다 몇 시간 당겨 인쇄했던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발행인 로이 말로니는 현대 역사에 길이 남는 헤드라인에 인쇄 ‘오케이 사인’을 남겼다. “트루먼, 듀이에게 패하다(Dewey defeats Truman).” 몇 시간 뒤 라디오에서 나온 소식에 이 신문사의 당혹감은 짐작이 간다. 초판 15만부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민주당 휩쓸다’라는 제목으로 급히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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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 고어(왼쪽)와 조지 W 부시가 펼쳤던 2000년 대선에 대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빗댄 영국 더 미러의 11월 9일자 1면 기사. “선거는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어떤 걸 가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라는 부제가 당시 한 달 이상 끌었던 ‘시소 대선’을 함축한다. AP 연합뉴스
앨 고어(왼쪽)와 조지 W 부시가 펼쳤던 2000년 대선에 대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빗댄 영국 더 미러의 11월 9일자 1면 기사. “선거는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어떤 걸 가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라는 부제가 당시 한 달 이상 끌었던 ‘시소 대선’을 함축한다.
AP 연합뉴스
대법원이 대선에 개입해 대통령을 결정한 경우도 있었다. 2000년 대선 결과는 플로리다주가 갈랐다. TV 매체들은 처음엔 앨 고어가 유리하다고 전하다 승패를 알 수 없는 초박빙이라고 보도했다. 불과 537표 차로 ‘아들’ 조지 W 부시가 플로리다(선거인단 25명)에서 승리해 선거인단 과반(270명)보다 한 명 더 많은 271명을 차지하면서 백악관에 들어갔다. 플로리다주 선거 결과는 투표 후 36일간 논란이 됐다. 부적절한 펀칭 기표와 유권자 등록 명부 실종 등 논란에 플로리다주 대법원이 수작업 재검표를 명했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이 “모든 투표는 동등하게 취급돼야 한다”고 명령하면서 재검표는 중단됐다. 이에 사법부 결정에 법관들의 정치적 견해가 담기면서 선거 결과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가 훼손됐다는 비판을 여태껏 받고 있다. 당시 플로리다 주지사는 부시의 동생 젭 부시였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2020-10-27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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