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사이트] 美대학 신입생 비자 발급 중단 후폭풍
“너무나 많은 대학이 급진좌파 이념에 물들었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념 주입이 아닌 교육을 받아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초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리고 대학의 면세 지위 및 연방정부 자금 지원에 대한 재검토를 언급했을 때 미 대학들은 돈을 죄어 압박하는 ‘트럼프식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소위 ‘배운 자’ 집단인 대학은 줄곧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인종차별적 적대감과 까다로운 비자 시스템 등이 미국 대학의 세계 경쟁력을 급격히 낮춘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학계의 반트럼프 정서를 ‘급진좌파’라는 과격한 표현으로 공격한 셈이다. 양측의 해묵은 갈등은 트럼프 행정부가 ‘외국인 신입 유학생’에 대한 비자 제한 조치를 단행하는 식으로 터졌다. 코로나19로 전면 온라인 강좌를 고집하는 대학들에 재정수입의 한 축인 유학생을 무기로 가을학기 정상 개교를 압박한 것이다. 하버드, 프린스턴 등 대학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결과 피해자는 죄 없는 신입 유학생이었다. 이들이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불과 30일도 안 남았다.학생 및 교환 방문자를 위한 비자 등 일부 비이민 비자 발급 업무가 재개된 지난달 20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의 비자 발급 창구에 시민들이 줄을 서고 있다.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하버드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등 200여개 대학과 17개 주 정부가 소송을 제기했고, 트럼프 행정부는 역풍에 부담을 느낀 듯 닷새 만에 해당 지침을 철회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10여일 뒤인 같은 달 24일 이번엔 가을학기에 100% 온라인 강좌를 수강하는 ‘신입 유학생’에게는 비자를 발급하지 않겠다고 공지했다.
‘학생 및 교환 방문자 프로그램’(SEVP) 규정에 따르면 미국 대학의 외국인 학생들은 학기당 한 과목만 온라인 강의를 들을 수 있는데, 지난 학기에 코로나19로 전면 온라인 강의를 예외로 허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ICE는 이런 예외가 재학생에게만 적용되며 신입생은 대상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미국의 한 대학 관계자는 “유학생이 2.5배나 많은 등록금을 내는 학교도 있다”며 “코로나19로 한 학기를 다니면 다음 학기는 무료로 해 주는 혜택 등이 생기고 있는데, 외국인 유학생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미 가을학기에 전면 온라인 강의를 택한 하버드대·MIT·프린스턴대 등 1250여개 대학(12%)은 신입 유학생을 받지 못한다. 이 외 온·오프라인 혼합 강의를 택한 곳은 34%고, 50%가량은 전면 대면 강의로 복귀한다. 대학가는 전면 온라인 강의를 택한 대학의 경우 유학생이 15~20%가량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이미 코로나19 사태만으로도 미국 현지 학생은 10%, 국제학생은 최대 15%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었다.
신입 유학생의 감소가 미국 대학 경쟁력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대학들이 더욱 우려하는 부분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줄곧 백인 외 인종에 대해 적대감을 보여 왔는데, 여기에 비자 발급까지 까다로워진다면 캐나다, 호주, 영국 등 다른 영어권 국가로 인재들이 빠져나갈 수 있다. 대학에 재정적 수입이 주는 것은 물론 다양성을 양분으로 발전해 온 미국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한편 미국에 우호적인 민간외교관도 줄어들 수 있다.
오하이오주의 한 대학 직원은 “신입 유학생뿐 아니라 기존 유학생들도 코로나19로 미국 영사관이 한동안 문을 닫으면서 비자를 받는 게 늦어지는 상황이어서 법적 입국 시한 전에 미국에 들어올 수 있을지 걱정이 크다”며 “온·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는 대학의 신입 유학생들도 원칙적으로는 비자 발급을 받을 수 있지만 영사관 측이 대면 강의 수강을 증명하는 까다로운 수준의 서류를 요구한다면 역시 기한 내 입국이 힘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학생들은 원칙적으로 개학 전에 입학해야 하는데, 이번 가을학기는 대부분 오는 24일에 문을 연다.
다만 미국 대학의 경쟁력 저하 우려에는 유학생을 소위 ‘봉’으로 취급한 대학 당국의 책임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8년 금융위기로 살림이 어려워지자 대학들은 외국 유학생 수를 늘리며 재정 확충에 성공했으나 너무 오른 등록금은 외려 학생 증가세 둔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실제 2014~2015학년도에 전년보다 10% 늘었던 미국 대학 유학생 수 증가율은 2016~2017학년도 3.4%로 떨어졌고 2018~2019학년도에는 0.05%로 제자리걸음을 했다. 2008~2009학년도에 67만 1616명이었던 유학생 수가 10년 만에 109만 5299명으로 늘었지만 증가율은 매년 줄어든 것이다.
한국 학생들도 미국 외 영어권 국가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 교육부에 따르면 미국 유학생 수는 지난해 5만 4555명으로 2018년(5만 8663명)보다 7% 감소한 반면 캐나다는 2018년 1만 2279명에서 지난해 1만 6495명으로 34.3%가 늘었다. 뉴질랜드(28.3%), 호주(11.7%), 영국(11.1%) 등도 두 자릿수 성장세를 기록했다.
힘들게 미국 대학에 입학한 신입 유학생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이메일을 보내 입학을 다음 학기로 유예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일부 대학은 그냥 본국에서 온라인 강의를 들으라고 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학생 김모씨는 “수만 달러에 달하는 학비를 내고 미국 입국도 못 한 채 온라인 수업을 들으라는 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향후 미국의 외국인 유학생 정책이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이미 2018년 10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중국 유학생의 비자를 전면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근에도 미 행정부가 휴스턴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하는 과정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많은 중국 유학생이 미국의 지식재산을 훔치기 위해 미국에 와 있다”고 비판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유학생 비자 제한을 포함한 반이민 기조는 시골 지역의 ‘샤이 트럼프’(숨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수단이다.
결국 대학가는 오는 11월 대선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민주당 조 바이든(전 부통령) 후보가 당선되면 인권, 환경, 다자주의를 중시하고 인종차별적인 분위기가 상당 부분 줄어드는 ‘정상화’가 진행될 거라는 기대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2020-08-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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