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속에는 40여종이 있으며, 대부분 열대 또 아열대 지방에 분포한다. 감은 한반도에서 오래도록 재배돼 온 과일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됐다. 그림은 우리가 감나무라 부르는 카키(kaki)종.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한가위쯤 날씨를 뜻하는 말이지만, 올 추석은 무척 더웠다. 식물은 온도 외에도 해의 길이로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지금 산에는 밤나무가, 마을 어귀와 정원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열매를 가득 매달고 있다.
이들은 명절 차례상에 오르는 과일이자 ‘시골’이라 불리는 농촌과 산촌 풍경을 이루는 대표 식물이다. 먼 옛날부터 서민들의 식량이 돼 준 밤, 겨우내 간식이었던 감, 아픈 이들에게 약이 돼 준 대추. 주식은 아니었으나, 우리의 삶 가장 가까이에서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형태를 달리해 온 식물들이다.
한반도에 대추가 들어온 시초는 알 수 없으나 본격적으로 대추를 재배한 건 고려시대라 추측한다. 옛날에는 부잣집 마당에 조경수로 대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대추를 가장 오랫동안 재배해 온 국가는 중국이다. 기원전 1000년 전부터 재배를 시작해 대추는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과수로 꼽힌다.
대추나무는 다른 식물보다 늦게 꽃을 피워 느긋하다는 의미로 ‘양반나무’라고도 부른다.
그런 대추나무가 우리나라에 도입돼 오랫동안 재배돼 온 이유는 다른 과수보다 재배가 수월하고, 열매가 많이 맺으며, 약효가 많기 때문이었다. 흔히 결혼식 폐백을 드릴 때 부모가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신부의 한복에 대추를 던져 주는데, 이는 열매가 많이 맺는 대추나무의 특성에서 유래한 풍습이다. 조상들은 대추를 먹으면 양기가 채워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안색이 좋아진다고도 믿었다. 그 때문에 대추는 감초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약재이자 요리 재료였다. 물론 이들은 이제 더이상 약재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달콤하고 아삭한 데다 과실이 큰 왕대추와 사과대추의 등장으로, 대추를 생과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도 우리나라에서 오래도록 재배돼 온 과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감을 처음 재배한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명종 때 감나무와 친척뻘인 고욤나무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고려 원종 때 ‘농상집요’에 감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후 홍시 만드는 법, 감식초 만드는 법에 관한 레시피도 기록됐다.
그러나 감은 현재 달콤한 아열대 과일의 등장으로 인해 소비량이 점점 줄고 있다. 물론 감도 아열대·온대 기후 원산이기에 사실상 지구온난화로 감을 재배할 수 있는 면적은 점점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어떻게 재도약을 할지 고민할 시점으로 보인다.
밤은 먼 옛날부터 조상들의 식량이 돼 주었기에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밤나무 재배를 장려했다.
이들은 말린 과일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요즘 건강식을 찾거나 외국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말린 과일의 소비량도 늘고 있다. 동남아에서 판매하는 열대과일 건조 칩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사과, 귤, 딸기 등을 건조해 과자로 판매한다. 생과는 기한 내에 빨리 먹어야 하지만, 건조과는 유통기한이 길어 보관이 편리하고 영양학적으로도 건강하기에 건조 과일의 소비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오랫동안 먹어 왔던 대표적인 건조 과일이 바로 곶감과 건대추다.
나 역시 매번 차례상에서 만나는 과일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건 식물 세밀화를 그리면서였다. 쑥 세밀화를 그리며 알게 된 농장에서 사과대추 한 봉을 보내 주었는데, 그 맛을 본 후로 대추의 달콤함에 푹 빠지게 됐고, 일본 진보초의 중고 서점에서 1940년대 기록된 일본의 감 그림 도감을 손에 쥐게 된 후로 우리나라의 감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대추나무꽃이 다른 꽃보다 늦게 핀다는 사실, 감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를 곤충들이 유난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농촌에 살던 내 고모 덕분이었다. 내가 서울 도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식물을 낯설게 느끼지 않은 것은 명절과 방학마다 시골의 고모와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만난 감나무, 대추나무, 백일홍, 봉선화, 꽈리…. 도시에선 만나기 힘들지만, 도시만 벗어나면 아주 흔히 만날 수 있는, 논과 밭 주변의 식물들과 친숙해졌다.
고모는 어릴 적 내게 봉선화 열매가 톡톡 터진다는 사실을, 백일홍꽃 한 송이에는 여러 꽃이 들어 있다는 사실도 보여 주었다. ‘시골’이라 부르는 농촌과 산촌은 나에게 식물이 참 많은 걸 주고, 채소와 과일도 나처럼 그저 살아 있는 생물이란 걸 알려 주었다.
이제 나는 어릴 적의 내가 기억하는 고모와 이모 나이가 됐다. 그러나 나는 내 고모와 이모처럼 농촌과 산촌에 살지 않는다. 또래의 친구와 지인 모두 아파트와 빌딩이 빼곡한 도시에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 조카는, 현재의 어린이들은 어디에서, 누구를 통해 자연을 경험하지?’ 물론 자연을 공부하기보다 코딩을 공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전보다 자연을 덜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류는 자연에 더 기댄다.
마침 얼마 전 열차역에서 ‘생태 유학 오세요’라는 문구를 내건 지역 광고를 보았다. TV에서 ‘촌캉스’란 용어를 내건 여행 프로그램도 봤다. 우리는 자연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많은 값어치를 들여 자연을 찾고 있다.
나 역시 도시에 살며, 어릴 적 주변 어른들로부터 받은 자연 경험을 현재의 어린이들에게 되돌려주지 못하는 부채감을 안고만 있을 뿐이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2024-09-25 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