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식물세밀화가
동물 이름을 가진 식물 중에는 까마귀쪽나무, 까치밥나무처럼 새의 이름을 빌리거나 토끼풀, 호랑가시나무처럼 포유류의 이름을 빌린 것들이 있다. 용은 실제 동물계에 속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그런데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인류는 오래전부터 식물에서 용의 형상을 찾고, 용의 이름을 빌려 이름을 지어 왔다.
용머리는 우리나라 자생식물로 꽃이 용의 얼굴을 닮았다. 여름에 푸른색과 흰색의 꽃이 핀다.
4년 전 베트남 호찌민에서 만난 용과는 마트에서 본 모습과 사뭇 다른, 사방에 긴 줄기를 늘어뜨린 선인장과의 덩굴식물이었다. 이들은 여느 덩굴식물처럼 지지대를 기어오르거나 기어오를 데가 없다면 땅에 늘어지는 형태로 최대 9m까지 뻗어 나간다. 이 모습이 용을 빼닮았다.
여의주 같은 붉은 용과를 자르면 까만 씨앗이 박혀 있는 흰 과육이 드러난다. 과육에서는 키위와 배 사이의 달곰한 맛과 퍼석한 식감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 이들은 망고나 파인애플 같은 달콤한 열대과일에 가려 그다지 인기가 있지는 않으나 정육면체로 잘라 다른 과일과 함께 먹거나 잼, 주스, 와인 등으로 가공해 먹을 수도 있다.
사실 용과의 특별한 매력은 꽃에 있다. 열매를 맺기 전 피우는 꽃은 지름 30㎝ 정도로 거대한 데다 개화 시간이 하루가 채 되지 않을 만큼 짧다. 게다가 밤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박쥐, 나방과 같은 야행성 동물에 의해 수분한다. 용과의 꽃을 보고 있으면 이 정도로 비범해야 용의 여의주가 될 수 있구나 싶다.
우리가 카페나 백화점에서 자주 만나는 관엽식물인 드라코 또한 용을 닮았다. 이들의 정명은 용혈수, 용의 피를 내뿜는 식물이라는 의미다. 용혈수의 줄기를 자르면 붉은 수액이 흘러나온다. 용혈수를 관찰하기 전에는 숱한 동물 가운데 굳이 용에 빗댄 것이 의아했으나 수액을 본 뒤 단번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갈색 줄기를 자른 단면에서 흑색에 가까울 만큼 진한 붉은색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데, 이 모습이 식물과 동물 사이에 있는 미지의 생물을 연상케 한다. 용의 피라 불리는 붉은 수액은 전통 의학과 바이올린 염색, 방부제에도 활용됐다.
용의 여의주를 닮은 과일 용과는 중남미 원산이지만, 실제 주 재배지는 동남아시아 베트남이다.
식물원의 온실에서 만나는 아가베 중 대표 종인 용설란은 잎의 형태가 용의 혀를 닮아 이름 붙여졌다. 이들 잎은 기다랗고 흰색에 가까운 옅은 청록색이다. 용설란은 꽃이 잘 피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일러도 수십 년에 한 번 꽃이 피는데, 꽃피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쓴 용설란은 개화 후 죽는다.
꽃이 금붕어를 닮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금어초는 스페인에서는 꽃 모양이 용의 입을 닮았다는 연유로 ‘스냅드래곤’이라는 영명으로 불리지만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에서는 사자의 입이라 불린다. 하나의 형태를 두고 나라마다 서로 다른 동물을 떠올린 셈이다.
우리나라 자생식물 중에도 용의 얼굴을 연상케 하는 식물이 있다. 용머리는 여름에 피는 꽃이 용의 얼굴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푸른 꽃 색 또한 용을 떠올리게 한다. 줄기마다 꽃이 달린 모습은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용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용의 이름을 빌린 식물은 공통으로 인간이 식물에 기대하는 수동적이고 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탈(脫)식물적 형태, 생태 특징을 가진 것이 많다. 인간은 의외의 면모를 가진 식물 종,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와 현상을 상상의 동물인 용과 같은 카테고리에 가둔 셈이다. 분명한 것은 땅에 고정돼 있고 동물에 견줘 움직임도 느린 식물조차 날아다니는 동물이 필요할 때는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우고, 햇빛이 필요할 때면 해가 드는 방향으로 줄기 끝을 내민다는 것이다.
식물과 달리 인간은 빠르게 움직이고 이동하는 혜택을 가졌다. 이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에 거만하지 않고 우리 각자가 원하는 것, 하고자 하는 바를 향해 직접 표현하고 행동하는 2024년이 되기를 바란다.
2024-01-1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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