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식물에게 겨울이 각박한 계절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봄과 여름, 가을보다 식물의 생장도 훨씬 느리다. 그러나 겨울에 눈에 띄는 식물의 기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바늘잎나무도 있고 겨우내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는 나무도 있다. 그리고 남부지역에는 겨울에도 잎이 푸른 상록수도, 꽃을 피우는 식물도 있다.
매해 겨울을 앞두고 나는 지도 교수님이 해 준 말씀을 떠올린다. “겨울이야말로 식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계절이다.”
겨울에는 잎과 꽃, 열매에 가려져 있던 가지와 줄기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내가 가장 스케치하기 어려워하는 나뭇가지의 자연스러운 곡선도, 가지의 무늿결도 쉬이 만날 수 있다.
덜꿩나무의 속명 바이버넘(Viburnum)은 ‘묶다’란 뜻의 라틴어 비에르(viere)에서 비롯됐으며 이 속 식물들은 가지가 특별히 길고 유연한 특성이 있다.
앞서 정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뒤에서 생명 유지 기반이 돼 주는 식물의 뼈. 평소에는 존재감을 느낄 수 없으나 다치고 부러지고 나서야 소중함을 아는 그런 몸의 기관이 바로 식물의 가지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덩굴식물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가지부터 수백 년간 살아온 고목의 단단하고 두꺼운 기둥까지 다양한 성질의 가지가 뻗어난다.
겨울 도심 화단에서 눈에 띄는 나무 중에는 흰말채나무가 있다. 이들 가지는 빨간색이다. 봄과 여름, 가을에는 녹색 잎과 흰 꽃, 열매에 가려져 이들은 다른 식물보다 그리 특별해 보이지도, 눈에 띄지도 않으나 새붉은 가지가 드러나는 겨울이 되면 사람들의 시선은 이들을 향하기 마련이다. 이 식물을 아파트와 관공서, 공원, 화단 등에 심으며 조경가가 기대하는 것은 겨울의 붉은 가지가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스트로브잣나무의 가지는 돌려나며 자란다. 가지의 배열이 스트로브잣나무 특유의 삼각수형을 만든다.
우리가 소나무를 두고 멋지다고 하는 것은 가지의 배열이 정형화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난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식물이 스스로 만든 가지의 배열에서는 전정하거나 철사를 매달아 생장을 유도한 분재와 조경 식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고, 이것이 사실상 우리가 찾는 궁극의 아름다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지는 외부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패도 된다. 한국 남부지역에 분포하는 호자나무는 가을이 지나 가지에 빨간 열매가 달린다. 이 열매는 너무나 탐스럽기에 자주 동물의 먹이가 된다. 그런 호자나무는 매개동물이 아닌 곤충에게서 열매를 지키기 위해 가지에 열매 지름의 두 배만 한 긴 가시를 달고 있다. 게다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긴 가지는 곤충이 올라오는 아래쪽을 향해 난다.
겨울까지 가지에 붉은 열매를 매다는 찔레꽃과 해당화 또한 기어오르는 곤충으로부터 꽃과 열매를 지키기 위해 가시의 방향이 아래를 향한다. 잎 사이 숨어 있던 가시에 손가락을 찔리며 관찰하던 시절이 무색하게도, 겨울에는 가시를 잘 피할 수 있다. 가지 안에 동물에게 해로운 액체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액체의 냄새는 종만의 향기가 되기도 한다. 소나무는 구과나 잎이 아닌 가지에서도 나뭇진을 방출한다. 목질화된 가지는 아니지만 식물의 줄기가 뻗는 방향도 다양하다. 딸기의 줄기는 옆으로 뻗어 새로운 개체를 번식한다.
지난주 작업실 앞 은사시나무 가지에 걸려 있던 단풍잎이 모두 떨어졌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은사시나무 뒤로 지난 계절 무성한 잎에 가려져 있던 건축물과 간판들이 보였다. ‘은사시나무 뒤에 저런 건물이 있었구나!’ 십여 년간 이 동네에 살면서도 보지 못했던 풍경에 놀랐다.
겨울은 식물의 잎도, 열매도, 꽃도 없는 계절이 아니라 이들에 가려져 있던 존재들이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절이란 것을 은사시나무가 내게 알려 주었다.
2023-12-13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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