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우리 주변 길가, 텃밭, 물가 등에서 꽃을 피우는 달맞이꽃.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그렇게 나는 몇 달에 걸쳐 내 작업실 앞 하천 주변에 핀 달맞이꽃을 관찰해 스케치와 채색까지 완성했다. 의뢰인을 만나 완성된 그림과 표본을 건네주던 날,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식량 불균등 배분 등을 걱정하며 GMO를 연구해야 하는 학자의 사명감과 애달픔에 대하여, 그리고 달맞이꽃처럼 자연스레 뿌리를 뻗어나가는 식물만 이용하며 인류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희망에 대하여.
푸른잎노랑낮달맞이꽃 ‘프루링스 골드’의 잎(왼쪽부터 시계 방향), 애기분홍낮달맞이꽃, 분홍낮달맞이꽃의 꽃.
밤을 기다리는 달맞이꽃처럼 이들을 그릴 땐 나도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나는 기다림에 꽤 익숙하다. 식물을 기록하면서 그렇게 됐다. 달빛 아래에서는 스케치를, 낮에는 선명한 제 색을 포착하기 위해 햇볕 아래에서 채색을 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의외의 장소에서 달맞이꽃을 다시 만났다. 우리나라의 담수생물을 연구하는 국립 연구기관에서 식물의 효용성을 연구한 결과를 사람들에게 그림으로서 알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기관에서 선정한 첫 식물이 바로 이들이었다.
달맞이꽃의 뿌리와 종자유의 효용성 연구는 이미 꾸준히 진행돼 왔고, 사람들은 갱년기, 콜레스테롤, 아토피를 개선하는 약으로 이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 기관은 달맞이꽃이 피부 노화 및 피부질환 개선에도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특허 출원까지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달맞이꽃을 두 번 그릴 운명이었던 것이다 한 번 기록한 식물을 수정, 추가할지언정 다시 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4년 전 그린 그림보다 학술적인 해부도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기로 하고 새로이 작업을 하게 됐다.
식물의 가능성, 자원화 연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릴 때엔 더욱 이 식물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비록 내가 연구한 결과물은 아닐지라도 이 작은 풀에게서 이토록 거대한 효과가 있다니 그 능력에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이 든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도 이 식물의 소중함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을 긋는다.
시간이 지나면 달맞이꽃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화장품과 건강 기능 식품도 나올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달맞이꽃은 더욱 귀한 식물로 여겨질 것이고. 내가 지금 그리는 이 그림은 화장품을 설명하는 패키지 디자인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식물의 가능성은 곧 식물세밀화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어제는 원예식물이 많이 식재된 춘천의 한 식물원 가드너에게 혹시 그곳에 달맞이꽃이 있는지를 물었다. “잎에 무늬가 있는 종이 있어요. 이름은 푸른잎노랑낮달맞이꽃 ‘프루링스 골드’예요.”
낮달맞이꽃이라니. 내가 그렸던 달맞이꽃이 낮에도 꽃을 피울 수 있게 됐다. 초록색 잎엔 노란색의 무늬도 생겼다. 낮에 꽃을 피우는 낮달맞이꽃, 달의 노란색이 아닌 분홍색을 띠는 분홍낮달맞이꽃, 그리고 그보다 꽃이 작은 애기분홍낮달맞이꽃으로, 달맞이꽃은 변형되고 확장돼 우리 주변의 풍경을 아름답게 하는 관상식물이 돼 준다.
나는 또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달맞이꽃 품종들을 그리고 있다. 이들의 개화를 기록하느라 기다렸던 낮의 시간만큼, 그렇게 기다림 끝에 만난 밤 어둠 속에서 확대경을 통해 보았던 샛노란 잎의 강렬한 빛만큼 도시에서 이들의 존재감이 더 커지길 바란다. 더더욱 귀한 식물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어느 의외의 순간에 또 달맞이꽃을 만나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08-15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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