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실의 Book 받치는 삶] 나는 어쩌다 이야기장수가 되었나/출판사 이야기장수 대표

[이연실의 Book 받치는 삶] 나는 어쩌다 이야기장수가 되었나/출판사 이야기장수 대표

입력 2022-03-20 20:34
수정 2022-03-21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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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실 출판사 이야기장수 대표
이연실 출판사 이야기장수 대표
이달부터 내 출판사를 시작하게 됐다. 출판계에는 임프린트(imprint)라는 제도가 있어서 대형 출판사들이 기획·편집력을 갖춘 출판인에게 단독 브랜드를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대형 출판사의 관리, 디자인, 마케팅, 제작 환경을 이용하면서 편집자 개인의 색깔을 살린 책도 맘껏 출판할 수 있는 매력적인 기회다. 개업날 시루떡을 돌렸더니 몇몇 사람들이 떡포장 스티커를 보고는 말했다. “맛있다. 근데 이야기장수라니, 떡집 이름 특이하네.” ‘이야기장수’는 떡집이 아니라 나의 새 출판사 이름이다.

조선 후기 이야기를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리에, 혹은 양반집 마당에 판을 깔고 소설을 낭독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흔히 전기수(傳奇?)라 불린 이들을 당시 사람들은 ‘이야기장사’라고도 불렀다. 바글바글 몰린 사람들 앞에서 신명나게 썰을 풀던 전기수는 이야기의 클라이맥스, 사람들이 옷고름을 잘근잘근 씹을 지경이 됐을 때 돌연 입을 닫는다. 아마 괜히 쌈지를 조몰락거렸다가 먼산도 보았다가 짐을 싸는 체했다가 꽤나 관중의 애간장을 태웠을 것이다. 그의 발치에 동전이 쏟아지고 난 뒤에야 이야기보따리는 다시 술술 풀려 나왔다. 이야기장수는 당대의 작가이자 연예인, 공연예술가, 그리고 탁월한 편집자였다.

요즈음의 책장수는 그런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출판계 사람들이나 애서가들에게 책은 삶의 필수품이자 마음의 양식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가 대세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들기 위해 몸과 형식을 수없이 바꿀지언정 정련된 이야기를 담은 그릇은 계속 팔릴 거라 믿는다. 수백 년 전 이 땅을 누비며 귀로 책을 듣는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던 거리의 이야기꾼, 이야기장수들을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책의 종말을, 이야기의 죽음을 말할 수가 없다.

앞으로 나는 21세기 이야기장수가 돼 볼 참이다. 장수의 기본 자질은 좋은 물건을 기막히게 잘 파는 것이다. 그리고 파는 사람은 살 사람에게 투덜대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책 안 읽는 사람들을, 요즘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독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각박한 시대를 주저앉아 원망하진 않을 것이다. 시장 상인들이 요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콩나물을 안 사 먹냐고, 손두부는 왜 안 먹고 양말은 왜 안 사 신느냐고 투덜대지 않듯이. 콩나물을 먹지 않으면 인생을 제대로 살 수가 없다고 우겨대지 않듯이. 쟁여 둔 물건이 안 팔리면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 큰 소리로 호객하고 손글씨 간판의 문구를 요리조리 바꾸며 손님을 끌 생각에 골몰하듯이. 나를 둘러싼 시대와 환경이 점점 어려워질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당신에게 어떻게든 가닿을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내게 책 만드는 일은 내 전부를 던지고 싶을 만큼 절대적으로 귀한 일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출판인의 이미지는 바쁘고 고단한 서민들 위에 군림하며 유교사상과 인간의 도리를 호통치는 양반님의 느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해 질 녘 거리에서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어 웃기고 울려 주는 이야기장수가 내가 생각하는 편집자의 상에 훨씬 가깝다.

이야기장수를 차린 이후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가끔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묻는다. “오늘도 가게 나갔니? 장사는 잘되느냐?” 그 통화는 늘 이렇게 끝난다. “그럼 가게 잘 지켜라, 이야기장수야.” 나의 작은 이야기가게는 오늘도 문을 열고 당신을 맞을 준비에 한창이다. 이 동네엔 당최 손님이 없다고, 사람들은 좋은 물건이 뭔지도 모른다고 투덜거리고 절망할 시간이 내겐 없다.
2022-03-2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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