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하이, 마이 하이샤파

[문화마당] 하이, 마이 하이샤파

입력 2024-06-27 01:00
수정 2024-06-2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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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드디어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따로 글을 가르쳐 준 적이 아직은 없는데, 이래저래 눈동냥으로 배워 온 모양이었다. 엄마로서는 아이가 글을 빠르게 익혀서 명석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겠지만, 작가로서는 아직 글자가 해석이 아닌 상상의 세계를 점령한 다양한 그림들이기를 소망했다. 숫자와 문자가 지시와 상징이 아닌 그림과 상상의 모둠이라면 그건 딱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정말이지 경이로운 포착들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더니 동료 작가인 김학찬 소설가가 아이에게 연필깎이를 보내왔다. 나중에 아이가 학교 들어갈 때 삼촌이 연필깎이라도 하나 사주라는 말을 지나가듯 한 기억이 있는데, 다소 이르게 보내온 거였다. 그런데 하이샤파라니. “아니, 이게 아직도 있어?” 고맙다는 말보다 저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1983년생으로 동갑인 김 작가와 내가 처음으로 썼던 연필깎이가 바로 저것이었다. 내친김에 역시 동갑인 전석순 소설가에게도 물었더니 ‘동네 사람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돈 모아서 사 줬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1가정 1하이샤파의 시대였던 거다. 그로부터 자그마치 삼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모습은 여전했다. 찾아보니 1980년에 최초로 생산됐고, 아직도 수리가 가능한 ‘현역’이라고 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아직 나의 본가의 오래된 책상에는 저 기차가 다가올 연필을 기다리며 색이 바래고 먼지가 끼어 있는 채로 놓여 있지 않은가. 한 타스의 연필을 길게 도열시켜 기찻길을 만들고 연필깎이 기차를 밀며 논 적도 있었다. 연필깎이에서 흑연이 쏟아진 줄 모르고 장판에 긋다가 엄마한테 혼난 건 뭐 덤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딸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는 자신의 첫 연필깎이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줄 한 번 긋고 연필 한 번 깎고 점 하나 찍고 다시 깎기를 반복했다. 그러느라 처음 꺼내 주었던 새 연필이 반토막이 났다. 그제야 아뿔싸, 저 연필이 오래전에 함정임 작가가 프랑스의 어느 미술관에서 보내 주었던 기념 연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둘러 다른 것으로 바꿔 주려고 했더니 아이가 안 된다고 소리치며 제가 깎은 첫 연필을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그동안 아이와 내 사이에서는 안 되는 게 너무도 많았는데 심지어 연필까지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연필깎이를 엄마가 만질까 봐 어린이집에도 가지고 간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내 마음이 연필심처럼 검어졌다. 역시 이것도 다 하이샤파 때문인 걸까.

어쨌든 나는 이 연필깎이를 쓰고 글자를 익혀 종내에는 작가가 됐다. 김학찬, 전석순 소설가도 나도 모두 다 등단 십 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힘세고 오래 가는 건전지처럼 열심히 많이 쓰자는 그 첫 마음은 몽당연필 같아졌다. 그래도 오늘 한 문장 더 썼다는 자그마한 희열이 우리 모두 하이샤파처럼 오래 같이 써 보자는 말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날이다. 처음의 무엇이, 저렇게나 소중했던 마음이 우리들에게도 있었잖은가. 각자 쓴 첫 책을 펼치고 사인을 하기 위해서 좋은 연필을 집어들던 순간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같이 있어 줄 하이샤파 같은 게 아닐까. 아이는 결국 연필깎이를 소중하게 안고 등원했다.

이은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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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소설가
이은선 소설가
2024-06-27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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