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모 방송작가
아는 이에게 물었더니 설정을 과거 시점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써 보라 했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며칠 전으로 돌려야 가장 안전한 걸까? 설정한 날짜 이후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새 작업이 있다면? 과거와 미래의 걱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일단 노트북은 살아 있으니 한숨을 돌리기로 하고 책을 들었다. 어쩌다 보니 올해 첫 독서는 작년에 읽은 얀 마텔의 소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재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불과 6개월 만에 다시 잡았는데 때때로 내용이 너무 낯설어 신기했다. 기억하고자 접어 둔 페이지와 지금 줄을 긋는 부분이 달랐고, 첫 독서 때 추측했던 인물의 감정과 다시 전해지는 그의 슬픔과 기쁨은 자주 어긋났다. 다만 같은 것은 첫 번째나 두 번째나 읽기에 몰입할 때 느끼는 행복감뿐이었다.
이 소설에는 뒤로 걷는 사람들이 나온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자들의 독특한 애도 방식이다. 뒤로 걷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시간을 복기하며 등으로 밀고 나가는 걸음이다. 그 행위가 매혹적이긴 하나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 실행해 보진 못했다. 그저 이 소설을 꼭 한번 더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쩌면 같은 책을 다시 읽는 것도 뒤로 걷는 것과 비슷한 의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고 올해 첫 영화를 보러 나갔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영화는 다도를 중심으로 느리고 지루한 시간이 펼쳐진다. 노스승인 다케타 선생은 다도를 배우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같은 사람들이 여러 번 차를 마셔도 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아요. 생에 단 한번이다 생각하고 임해주세요.”
새해맞이 다도회에는 그해의 동물이 그려진 찻잔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올해 첫 다도회엔 12년 전 꺼내 쓰고 깊숙이 보관했던 돼지 문양의 찻잔이 등장했을 것이고, 모임 후 갈무리한 찻잔은 앞으로 또 12년을 살아내야 다시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1년의 반복에 열두 해 터울의 반복이 겹쳐 있으니, 차를 마시는 사람은 그 찻잔 속에 담긴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된다.
‘일일시호일’과 비슷한 조합으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란 말이 있다.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이 자신의 좌우명이라며 수업 시간에 유독 강조했던 구절이다. 뒤늦게 궁금해진다. 그분의 삶에는 어떤 평화가 있었을까.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일일시호일’이 같은 일상에서 기쁨을 건지는 지혜라면, ‘매일매일 새로워지라’는 ‘일신우일신’은 반복을 허락하지 않는 호된 채찍질일 테니….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렇게 한나절 이런저런 딴짓으로 마음을 정돈한 후 데스크톱 컴퓨터 문제로 돌아왔다. 해결 과정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하고 쉬웠다. 본체를 열어 보니 부속들 틈틈이 먼지가 수북했다. 진공청소기를 대고 샅샅이 훑었다. 뚜껑을 닫고 전원을 켜니 모든 게 정상이 됐다. 과거와 미래의 걱정들도 먼지와 함께 날아갔다. 복구를 기념하며 ‘같은 것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영화 속 대사를 포스트잇에 적어 모니터에 붙였다.
익숙한 자판과 모니터로 지루한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할 때,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2019-01-3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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