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어쩌면 기적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이애경 작가·작사가

[문화마당] 어쩌면 기적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이애경 작가·작사가

입력 2015-01-15 00:18
수정 2015-01-15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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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경 작사가
이애경 작사가
아침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다. 아파트 발코니에 있던 난에 꽃이 피었다며 와서 보라고 아빠가 부르시는 것이었다.

아빠는 하도 꽃이 피지 않고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얼마 전에 버리려고 생각 중이셨다며 노랗게 피어난 꽃을 보고 신기해하셨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 이사를 온 뒤, 그러니까 10년 동안 한 번도 피지 않은 꽃. 난이라고 불리기에도 어정쩡했던 잡풀처럼 생긴 초록색 이파리 사이로 네댓 송이 꽃이 보란 듯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점잖게 흥분하신 아빠의 음성 뒤로 엄마가 손으로 꼽아 보시더니 10년이 아니라 20년 만에 처음 핀 꽃이라고 하신다. 20년 전 친구들에게 꽃이 핀 난을 선물받았고, 그때 이후로 두 번째로 꽃을 보신다는 것이다. 아빠는 더욱 기분이 좋아져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려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좋은 일이 있으려나?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좋고,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 이미 내 눈앞에 기적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온 가족이 이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며 이렇게 기쁜 아침을 맞고 있으니 말이다.

기적이란 그런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것.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거나, 중병에 걸렸던 사람의 병이 순식간에 낫거나, 중고생 시절 내내 전교 꼴찌이던 학생이 어느 날 전국 1등을 하거나, 복권에 당첨되어 엄청난 부자가 되는 것 정도는 되어야 기적이라고 생각하기에 내 삶에서 기적은 손에 닿지 않는 저 멀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 빤하고, 매일이 똑같고, 하루하루가 그저 그런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 기적이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큰 변화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기적은 버둥거리다가 끝끝내 몸을 뒤집은 아기의 끝없는 열정에서도, 단어 한마디도 잘 말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장으로 터져 나오는 아이의 말소리에서도, 대열을 맞춰 날아가는 새들의 비행에서도, 돌무더기 사이에서 틈을 비집고 피어난 민들레꽃에서도,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 드리는 청년의 마음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의정부 화재 참사에서 밧줄을 묶어 온몸으로 지탱하며 열 명의 인명을 구한 시민의 마음, 자기에게 벌어질 위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우선 다른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시작된 바로 그곳이 기적이다. 폐지를 주워 모은 돈으로 좋은 일에 써 달라며 이름조차 남기지 않는 선행 천사들의 마음이 시작된 곳, 그곳 또한 기적이 있는 곳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쉽게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일이기에 그 모든 생각과 행동은 기적이고 기쁨이다.

자극적이고 강한 것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어쩌면 기적조차 그런 것을 원하기에 소소한 기적이 주는 행복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기적은 명사가 아닌 동사, 마음의 움직임이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생명력인 것이다. 이 생명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타고 또 타고 다니며 아름다운 영향력을 만들어 낸다.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래도 살 만하다’는 희망의 빛을 비춰 주고 우리의 마음을 들썩이게 해 주니까.
2015-01-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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