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어른과 노인/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문화마당] 어른과 노인/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14-09-11 00:00
수정 2014-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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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요즘 한국사회에 진정한 리더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리더십 강연과 서적이 10년이 넘도록 꼬리를 물고 있지만, 리더로서 갖출 테크닉(기술)만 천편일률적으로 되뇐다. 심지어 그런 테크닉을 상품화해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리더십 열풍 10년이건만 리더가 여전히 오리무중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리더십 열풍의 배경에는 리더를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요즘 식을 줄 모르는 이순신 열풍도 이런 현실의 산물이다. 국가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총체적 와해 국면에 처한 누란지세(卵之勢)의 조선 땅에서 홀연히 일어나 외롭게 분투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이순신이었으니, 그가 출중한 리더임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오늘날 한국의 영화 스크린을 장악할 만하다.

그렇지만 지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사회에 정작 필요한 리더는 이순신같이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 한 사람이 아니라, 이순신의 1%라도 실천하는 다수의 보통 리더요, 보통 사람들이다. 한국은 헌법상 민주주의 국가이고, 또한 실제로도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 ‘leader’(리더)의 사전적 의미는 ‘지도자’이지만, 그 의미를 보다 잘 함축한 우리말로는 ‘어른’을 꼽을 수 있다. 진영과 정파 논리를 넘어 그 말에 정의로운 권위가 있는 어른, 상식을 실천하며 민초의 존경을 받는 어른, 이해관계를 떠나 공정한 언행으로 귀감이 되는 어른. 경륜이 묻어나는 연배와 함께 바로 이런 인격과 품행이 받쳐줘야 어른이라 이를 만하다. 그런데 요즘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어렵다.

인왕산자락과 여의도는 아집과 이해관계로 갈라져, 어른이 자리할 여지조차 없다. 광화문과 서울광장까지 그렇게 물들어버렸다. 서울의 번뜩이는 마천루는 재벌공룡의 모습을 위압적으로 보여줄 뿐 어른의 그림자를 이 회색빛 양극화 도시에 드리우지는 않는다. 관악산을 비롯해 여기저기 자리한 상아탑도 교사와 학생의 바쁜 발자국 소리에는 익숙하나, 어른의 기침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지는 기억조차 흐릿하다. 십자가의 의미를 전하는 곳은 헤롯의 성전처럼 번득일 뿐 어른은 늘 부재 중이다. 불법(佛法)을 닦는 곳도 불상은 점점 커가건만 이판(理判) 어른은 노상 출타 중이다.

정치인, 재벌, 교사, 종교인만 탓할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동네 어른이 더 절실하다. 전철에도 시장에도 파출소에도 등산로에도 길거리에도 어른이 필요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전통이 깊은 우리 사회에서는 연세 지긋하신 분들일수록 어른의 잠재력이 강하다. 그렇지만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인격과 언행이 함께 따라야 한 가정과 한 사회의 든든한 어른이지, 그렇지 않다면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스러운 한갓 노인일 뿐이다. 노인은 많고 어른이 없는 사회는 삶이 늘 팍팍하다.

요즘 ‘신386’이라는 말이 항간에 떠돈다. 193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금 80세 언저리의 사람들을 이르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산업화 시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축복 받은 세대임에도 아래의 젊은 세대들을 누르고 아직도 국가의 주요 실직을 줄줄이 장악한 현실을 빗댄 풍자이기도 하다. 어른이라면 유쾌한 풍자이겠으나, 노인이라면 우울할 뿐이다. 혹시 후자이기 때문일까. 을지문덕 장군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까닭 말이다.
2014-09-1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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