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기의 예술동행] 예술에는 정년이 없다/서울문화재단 대표

[이창기의 예술동행] 예술에는 정년이 없다/서울문화재단 대표

입력 2023-11-14 00:05
수정 2023-11-1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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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 서울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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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초겨울 추위를 가르며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공연장을 찾았다. 전축과 첼로, 그랜드피아노가 무심하게 놓인 무대 위로 배우 박정자가 덤덤히 등장했다. ‘브람스라 부르자’는 클래식 모놀로그 작품이다. 그윽하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객석을 응시하며 그는 대사의 첫 음절을 떼었고,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가 순식간에 무대를 장악하며 소름을 돋게 했다. 성실하고 올곧게 걸어온 연극 인생 60년을 보이기라도 하듯 정확한 발음과 발성, 관록 넘치는 연기는 극의 몰입을 더했다.

최근 원로 예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지난 8월 배우 손숙의 데뷔 60년 기념작인 창작 연극 ‘토카타’가 무대에 올랐다. 10월에는 구순 나이가 무색할 만큼 매섭고 에너지 넘치는 김우옥 연출의 한층 더 실험성 깊어진 ‘겹괴기담’이 성황리에 끝났다. 합산 나이 315세로 표현되는 배우 신구, 박근형, 박정자는 ‘고도를 기다리며’로 다가오는 12월부터 두 달간 매일 무대에 서서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

한 분야에서 60년 이상의 시간을 지속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을 여섯 번이나 갈아치울 만큼의 세월 동안 온갖 실패와 성공, 좌절과 기쁨을 수없이 반복하며 예술적 정체성을 견고히 해 나갔을 것이다. 뚜벅뚜벅 걸어온 그들의 예술 여정 속에서 쌓여 온 작품을 경험하는 후배들은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원로 예술가의 경험과 지혜는 다음 세대에 전달돼 예술의 연속성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세대를 아울러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예술계를 위해서는 신진, 중견 예술가뿐만 아니라 원로 예술가의 창작활동도 계속될 수 있는 울타리가 필요하다. 나이에 의해 활동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자신의 창작 의지에 따라 예술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원로 예술가에게 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지난 2년간 서울에서 예술 활동을 계획한 원로 예술가의 지원 신청이 연간 63%나 증가할 만큼 예술계에서 원로 예술가 지원에 대한 현장 수요는 분명했다. 전국적으로 60대 이상의 예술가는 약 18%로 3만여명(예술활동 증명 기준)에 이른다. 초고령화 시대를 앞둔 한국 사회의 고령화 시계를 감안한다면 원로 예술가의 비율은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예술에는 정년이 없다. 평생에 걸쳐 예술은 계속되고 발전해 나간다. 예술가에게 예술 활동은 삶의 반려로서 끊임없는 탐구와 창조의 과정을 통해 미래 예술가들에게 이어질 무한한 영감과 지혜를 제공한다. 오랜 세월 자신의 무대를 통해 쌓아 온 예술적 기반은 예술가로서의 철학과 예술성을 형성하고, 깊고 폭넓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예술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정수를 맛보게 한다.

구순을 앞둔 배우 이순재가 지난해 세계 최고령 리어왕이라는 기록을 세운 데 이어 연출가로 도전하던 중 한 방송 인터뷰에서 “예술에는 완성이란 없다”고 말했다. 정년퇴직 없는 예술가의 삶을 바로 보여 주는 ‘여전히 현역’과 같은 그의 모습에서 끝없는 도전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본다.
2023-11-1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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