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민 북유튜버
하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과 파사현정(破邪顯正)으로 구축된 상상의 세계는 의사(擬似)현실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더라도 이해관계는 숨어 있을 수밖에 없다. 적나라하게 이익만을 추구해도 결과적으로 공공선을 증진하기도 한다. 생활의 세계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정신 승리에는 이바지하겠지만 현실 적합도를 떨어뜨려 미래를 왜곡할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현재는 비상시다. 위기를 뚫고 나가려면 평소보다 더욱 광범위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한층 정밀하게 분석해 최적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모두가 납득하고 다 함께 실천하기 위한 대전제는 객관적인 현실 인식이다.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이 최우선적으로 요청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태는 여의치 않다. 진위를 가려야 할 그들이 오히려 확증편향을 갖고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데 열심이다. 우리 진영의 이익과 믿음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정보나 자료는 거들떠보지도 않을뿐더러 음해까지 서슴지 않는다.
사실 사건과 사고의 홍수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갈수록 모호하고 어려워지고 있다. 전문가도 힘든 판에 일반인이 견뎌 내기는 쉽지 않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반지성이다. 인식 대신 믿음을, 현실 대신 환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중에게 단순 명료한 메시지로 세계를 알려 주는 지침을 내려먹인다. 무조건 우리는 진리고 적들은 거짓이다!
그러나 주관적 기대는 객관적 현실을 꺾을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무시하던 미국 대통령의 감염은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과거부터 이어 온 집단적 확신이나 경험은 새로운 사태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실제의 현상을 정치적 손익으로 재단하다가 확진자와 사망자가 폭증하는 비극을 맞게 된 것이 현재의 미국이 아닌가.
항상 해답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믿는 대로 보지 말고 있는 대로 봐야 한다. 편견이나 편향이 없다고 구성원 모두가 신뢰할 때, 공동체의 위기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 불편부당을 존재 이유로 내세우는 지성인의 역할이 중차대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본질적으로 ‘무소속’이기 때문에 브레이크가 될 수 있다. 혈연, 학연, 지연을 따지는 연고주의자들은 물질적 가치에 침윤돼 위기에 아랑곳없이 파벌과 집단의 이익만을 맹종한다. 모두의 신용을 얻을 턱이 없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려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자유로운 지성만이 대붕괴를 막는 제동장치가 된다. 특정한 사람만이 브레이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따져 보면 무소속의 결정판은 정부와 언론이다. 사적 이익으로 낙착되더라도 공공재의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행정과 보도다. 둘 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치닫는, 그래서 사회 전체를 와해하려는 움직임을 잘 제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를 연구한 종교학자 오강남은 우선 사물을 다각적으로 볼 수 있는 양행(兩行)의 길을 터득하라고 권한다. 현상의 한 면만 절대화해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상아(吾喪我)도 중요하다. 사건과 사람을 정밀하게 보려면 세속에 찌든 자의식을 던져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밀실에 갇혀 지냈던 우리 사회가 새해엔 광장에서 다 함께 거듭나기를 간절히 희원한다.
2020-12-09 27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