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훈의 간 맞추기] 남이 해 준 밥을 먹는 자의 윤리

[유정훈의 간 맞추기] 남이 해 준 밥을 먹는 자의 윤리

입력 2020-12-22 20:10
수정 2020-12-23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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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훈 변호사
유정훈 변호사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한 끼의 식사’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사람이라 일상의 끼니에도 매우 공을 들인다. 카레라이스를 만들 때 고형카레 제품을 쓰긴 하지만 나머지 과정에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양파를 캐러멜화될 때까지 볶고, 토마토를 넉넉히 넣고, 직접 만든 치킨스톡을 쓴다. 요리를 끝내면 흡입해야 할 것 같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냄새가 강한 음식을 만든 나는 이미 후각의 절반은 잃어버린 상태다. 맛을 제대로 느낄 리 없다. 다행인 것은, 우선 카레는 언제나 ‘어제 만든 카레’가 더 맛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이런 노력을 온전히 인정하고 고마워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집에서 사골곰탕을 끓이면 정작 엄마는 잘 드시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곰탕 끓여 놓고 친구들과 멀리 놀러 가신 것도 아니고, ‘어머님은 곰탕이 싫다고 하셨어’를 읊어야 할 상황도 아니다. 소뼈에서 나오는 기름 냄새를 여러 시간 맡았으니 당연히 손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후각이 무척 예민한 양반이.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재택근무, 온라인수업으로 인해 올해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이 집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돌밥’ 즉 ‘돌아서면 밥하고 돌아서면 밥한다’는 신조어가 생겼다.

대부분의 사람은 집밥이든 외식이든 배달이든 남이 해 준 밥을 먹는다. 가사노동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한솥에 밥을 하면 내 밥과 네 밥이 구분되지 않으니 더욱 문제다. 하지만 집밥을 먹을 때는 누군가 자신의 후각과 미각을 희생해 가며 한 끼의 식사를 수고롭게 준비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리는 것 자체는 괜찮으나, 눈앞에 있는 준비한 사람에게 격한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내 식탁에서는 퇴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남이 차려 준 음식에 대해 현장에서 지적질을 하는 것도 삼가야 한다. 최고 수준의 레스토랑에 별점을 매기는 심사위원도 그러지는 않는다. ‘간단하게 국수나 말아 먹자’처럼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부정을 주장하는 트윗보다 황당한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을 일이며, ‘한국 사람은 밥심’이라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들이대며 힘들여 차린 밀가루 음식 앞에서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은 갖추어야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는 김치’ 혹은 ‘고기반찬 있어야 밥 먹는다’ 같은 혼자만의 판타지를 관습헌법인 양 주장하면 곤란하다. 반찬 투정을 하지 않는 것은 성인이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아이들의 편식에는 엄격하면서 어른의 반찬 투정을 식성 혹은 까다로운 입맛으로 미화해 줄 이유는 없다. 주는 대로 맛있게 먹는 자에게 복이 있다.

마지막으로, 남이 해 준 밥을 먹은 후에는 재깍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먹었으면 설거지를 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다음 끼니가 그들의 것이다. 그게 시대정신인 ‘공정’에도 부합하는 일 아닌가.
2020-12-2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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