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나는 저항한다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나는 저항한다

입력 2019-04-09 17:30
수정 2019-04-10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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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260×340㎝, 프라도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260×340㎝, 프라도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1808년 3월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를 강제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호세 1세로 왕위에 앉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스페인 민중은 반발했다.

소요가 격화되자 5월 2일 조아생 뮈라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마드리드로 진격했다. 진압에 앞장선 이집트 맘루크족 용병 부대는 잔인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고야는 연작인 ‘1808년 5월 2일’에서 시위대가 거의 맨주먹으로 이집트 기병대와 싸우는 광경을 묘사했다. 이튿날 밤 프랑스군은 시위대를 보이는 대로 잡아다 총살했지만, 항거는 더 거세졌다.

‘1808년 5월 3일’에서는 프랑스군이 시위에 나선 민중을 사살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왼편에 피투성이 시체들이 쓰러져 있고,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총구를 마주 보고 있다. 그 옆에는 끌려온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마드리드 시가지가 보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눈을 가리거나, 마지막 기도를 올리지만 한 사람만은 두 팔을 쳐들고 죽음에 맞선다. 검은 얼굴과 남루한 흰 셔츠가 바닥에 놓인 등불을 받아 환히 빛난다.

나폴레옹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고야의 입장은 애매했다. 고야는 프랑스혁명에 호의적이었고 왕실을 존경하지 않았지만, 왕실 화가라는 직책은 유지하고 싶었다. 1808년 저항 운동의 최후 거점인 사라고사로 가서 스페인 민중의 영웅적 행동과 전쟁의 참상을 그렸지만, 1809년 마드리드로 돌아와서는 호세 1세의 초상화를 그렸고, 새 왕에게 훈장도 받았다.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났고, 호세 1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되돌아온 스페인 왕정은 무자비한 보복을 시작했다. 고야는 국외로 도망칠까 하다가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유럽의 폭군에 대한 우리의 눈부신 반란”을 묘사하고 싶은데 전쟁으로 가난뱅이가 됐기 때문에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청원서는 고야의 자구책이었는지 모르지만, 연작 그림들에 기울인 열정만큼은 진심이었다.

‘1808년 5월 3일’은 항상 짓밟혀 온 민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역사화로 사회에 대한 분노와 혁명에 이바지하는 모든 그림의 원형이 됐다.
2019-04-10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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