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이후의 많은 예술 애호가들이 메디치가의 방식을 답습해 예술을 후원했지만 현대에 들어선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예술 후원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에게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의 운영 방식과 비전은 많은 시사점을 안겨 준다. 프랑스 명품 업체인 카르티에가 1984년 설립한 재단은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출발했다. 창립 원칙을 지켜 나가는 그들의 태도는 커미션 방식의 작품 구입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카르티에 재단은 독창적이고 탁월한 작가에게 전시 참여를 제안하고 새로운 작품을 의뢰한다. “작품을 의뢰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지적이고 기술적인 도움을 포함한 일체의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수반한다. 작가가 풀어내려는 개념을 스스로 탐색하도록 전적으로 지원한다.” 이런 자세로 단순히 소장품 리스트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전시를 위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무제한의 자유를 확신하게 된 작가들은 창조적 본능을 마음껏 펼치게 된다. 큐레이터들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도울 태세를 갖추고 작가 주변에 대기하고 있고, 재단은 작가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작품의 보존이나 운송, 제작 지원까지 창작 기간 전후에 걸쳐 제공한다.
그런가 하면 예술과 지식의 범주를 넘나드는 학제적 작업으로 호기심의 경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시각예술가뿐 아니라 저명한 사상가, 철학자, 과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들과의 만남과 생각의 교류를 통해 다른 미술관들이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에 대해 탐구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주제는 현대미술의 협소한 반경을 뛰어넘어 전지구적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인문과학, 환경, 생태학, 도시화까지 확산된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협업을 하면서 경이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장품 하이라이트전에서 보듯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창조적이고 혁신적이며 현대 미술의 흐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예술후원자는 공공 섹터다. 정부와 지자체, 공공기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지만 공정정과 효율성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예술 후원이 예술가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새로운 작업을 이끌어 내는 동력이 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차별 없이 후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 1원칙이 돼야 할 것이다. 예술계 블랙리스트 파문과 최순실 국정 농단 연계 등으로 무너진 문화 행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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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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