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2021. 테오도라 사망 후 황제는 병석에서 홀로 통치했다.
테오도라는 한때 고위 관리의 정부가 돼 북아프리카로 갔다가 크게 다투고 헤어진 다음 그녀가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갈 여비를 벌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모친인 황후의 반대가 매우 완강했다. 농민 출신의 황후는 자기보다 더 비천한 혈통의 여성을 며느리로 삼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524년 그녀가 죽자 이듬해 둘은 소피아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백성들은 이 결혼을 제국의 수치로 여겼지만, 테오도라는 때로 황제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다.
527년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치세 초기 사회적 불만이 팽배했다. 532년 1월 13일 원형경기장에서 전차 경주가 벌어졌다. 성난 군중이 황제를 향해 함성을 질렀다. 경주는 취소되고 군중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니카의 반란’이다. 황제가 주재한 회의에서 측근들은 황제에게 피신을 권했다. 이때 테오도라가 끼어들어 지금 도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어떻게 황제가 두려움 때문에 몸을 피한단 말입니까. 저는 결코 제 손으로 황후의 옷을 벗지 않을 것이며, 죽는 순간까지 황후의 명칭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조언을 들은 황제는 도망갈 생각을 접고 군대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기로 했다. 원형경기장 안 군중을 기습했다. 무차별 학살이 자행됐다. 경기장 출구마다 병력을 배치해 놓고 달아나려 하는 자는 모조리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원형경기장을 메웠던 분노의 함성은 불과 몇 분 만에 죽어 가는 자들의 신음으로 바뀌었다.
사실상의 공동 통치자였던 테오도라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을 만들고, 매춘부의 재활을 지원하는 등 천민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펴서 인기를 얻은 일면도 있었다.
2021-12-0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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