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대전
식구 많은 집에서 어머니가 저녁 식탁에 된장찌개를 준비한다. 국물 맛을 내기 위해 소고기 몇 점을 투하한다. 식탁에 둘러앉은 형제들 사이에 ‘낚시 전쟁’이 벌어진다. 고기를 먼저 건져 먹기 위해 젓가락 신공이 펼쳐지는 것. 젓가락 끝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든다. 고기다. 재빨리 낚아채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금니로 깨무는 순간 아뿔싸, 고기인 줄 알았더니 된장 덩어리를 씹은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 모두가 공감하면서 청취했던 퀴즈 게임이다.
권투, 레슬링 경기도 라디오 중계로 들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시각적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했다. 임택근 아나운서(가수 임재범, 탤런트 손지창의 아버지)와 이광재 아나운서가 당시엔 최고 인기였다. 임택근이 중후하고 차분한 톤이었다면,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이광재의 애국심 가득한 중계는 곧잘 격앙된 톤으로 이어지곤 했다. 권투 시합을 이광재 중계로 듣다 보면 한국 선수가 이긴 줄 알았다가 뜻밖에 상대방의 승리로 끝나는 때도 있었다. 흥분한 나머지 우리 선수 공격 장면을 강조하다 보니 청취자로서는 오판할 수밖에.
많은 가정에 금성 라디오가 있었다. 하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시인 김수영은 1966년 9월 금성 라디오를 처음 장만했다. 일시불이 아니고 일수(日收)로 대금을 치렀다. 가난한 살림이라 라디오 값을 매일매일 나누어 갚은 것이다. 뒷마당에 닭을 길렀으니, 달걀을 팔아 일수 대금을 치렀을까? 그에겐 라디오도 사치품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타락했음을 괴로워한다. “금성 라디오 A 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500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그만큼 손쉽게/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금성 라디오’)
도시 이곳저곳에는 지금도 금성 라디오의 가난한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2018-08-22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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